‹ 목록으로 여인천하의 절대치유사

4화

삼 일 뒤, 국초국 정기검사가 있었다. 전날 밤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몇 번이나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하연을 치유했던 그날의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따뜻하고, 낯설고, 무서운 감각이었다. 혹시 검사에서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누나가 알게 되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몇 번이나 이불을 걷어찼다가 다시 덮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잠들었다. 아침이 되자 학교 전체가 술렁였다. 정기검사가 있는 날은 늘 그랬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애들마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번엔 또 몇 명이나 걸릴까." "남자는 원래 거의 안 걸린다며." "그래도 모르는 거잖아. 작년에 3학년 선배도..."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체육관에 도착하니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요원들이 여럿 서 있었고, 중앙에는 은색 원통 모양의 장비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 손을 넣으면 몸속의 에너지 흐름을 읽어낸다고 했다. 원통 표면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냉각 장치가 작동하는지 낮은 기계음이 체육관 전체에 깔려 있었다. 나는 줄 맨 뒤에 서서 앞사람들이 하나씩 검사받는 걸 지켜봤다. "통과." "통과." "통과." 대부분 그렇게 짧게 끝났다. 이 세계에서 남자가 각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니까. 여자아이 하나가 원통에서 손을 빼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게 보였다. 그 옆에 서 있던 친구가 등을 두드려주며 웃었다. 나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내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빨리 뛰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나는 옷자락에 슬쩍 손을 문질렀다. "다음." 짧은 빨간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진 여자가 나를 불렀다. 귀에는 여러 개의 피어싱이 반짝였다. 표정에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목에 걸린 요원증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그때는 미처 읽지 못했다. 나는 원통 안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을 감쌌다. 소름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기계가 낮게 웅웅거렸다. 윙- 윙-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착각인가. 나는 숨을 죽였다. 빨간 머리 여자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 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졌다. "...이상하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뭐가요?" 나는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애를 썼다. "수치가 살짝 흔들렸어." 그녀가 나를 똑바로 봤다. 회색 눈이 나를 훑듯이 살폈다. "근데 임계치는 안 넘었네. 오차범위 안이야." 숨이 조금 트였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빠졌다. "신기하네. 이런 경우 잘 없는데." 그녀가 태블릿을 몇 번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혹시 최근에 몸에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니요. 없어요."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녀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강미래."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였다. 누나가 어느새 검사장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정장 차림에 요원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하이힐 소리가 체육관 바닥을 또각또각 울리며 다가왔다. 빨간 머리 여자, 강미래가 누나를 돌아봤다. "팀장님이 여긴 어쩐 일로." "이 학교 담당이 나야. 알잖아." 누나가 나를 힐끗 보고는 다시 미래를 봤다.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가 다시 평온해졌다. "수치 얼마나 나왔어?" "오차범위 안이에요. 별문제 없어요." 미래가 태블릿을 누나에게 건넸다. 누나가 화면을 확인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넘기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가 다시 풀렸다. "수고했어. 다음 검사자 진행해." 미래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지나쳐 다음 사람을 불렀다. 나는 원통에서 손을 빼며 누나 쪽을 봤다. 누나는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태블릿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떨림을 감추려는 듯 누나가 태블릿을 옆구리에 바짝 붙였다. *** 검사가 끝나고, 체육관 밖 복도에서 누나를 다시 만났다. 복도는 오전 햇살이 들어와 밝았지만, 그 안에서도 이상하게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번엔 다른 여자와 함께였다. 키가 작고, 은색 긴 머리에 파란 리본을 묶은 사람이었다. 파란 눈이 유난히 밝았다. 발소리도 없이 걸어오는 게 신기했다. 마치 바닥을 스치듯 미끄러지는 걸음걸이였다. "소라야, 얘가 내 동생." 누나가 짧게 소개했다. "안녕! 도현이지? 얘기 많이 들었어." 은발의 여자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목소리가 밝고 경쾌했다. 웃을 때 눈가에 잡히는 주름까지 다 상냥해 보였다. "나는 윤소라야. 언니랑 같은 팀이야." "안녕하세요." "진짜 닮았다, 눈매가." 소라가 신기하다는 듯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언니가 동생 얘기할 때마다 얼마나 자랑하는데. 알아?" 누나가 헛기침을 하며 소라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에이, 사실이잖아." 소라의 시선이 잠시 내 손목께에 머물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결계구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주변의 에너지 흐름에 민감할 테니까.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소라의 눈이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을 때, 그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여전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착각이었을까. "언니, 나 먼저 갈게. 브리핑 시간 다 됐어." 소라가 손을 흔들며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았다. 누나와 나만 남았다. 복도는 조용했다. 창밖에서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도현아." 누나가 낮게 불렀다. "네." "방금... 검사 결과, 진짜 아무것도 없었어?" 누나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 속에 걱정과 의심이 동시에 담겨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하연을 치유했던 손의 감각이 다시 떠올랐다. 손바닥 안쪽에서 따뜻한 열기가 맴돌던 그 순간이. 누나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하지만 말하는 순간, 누나가 어떤 선택을 강요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요원인 누나가 알게 되면, 보고 의무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나는, 이 세계에서 어떤 존재로 분류될까. 실험 대상? 감시 대상? 아니면 더 나쁜 무언가? 생각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없었어요." 거짓말이었다. 처음으로 누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말을 내뱉는 순간, 혀끝이 쓰게 느껴졌다. 목구멍 안쪽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누나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믿는 것도, 안 믿는 것도 아닌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게 힘들어서 나는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래." 누나가 짧게 말했다. "그럼 됐어." 목소리에 안도와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누나가 몸을 돌리려는데, 미래가 다시 복도로 나왔다. 구두 소리가 급하게 울렸다. 또각, 또각, 또각- "팀장님, 상부에서 호출입니다. 지금 바로요." 누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무슨 일인데." "저도 몰라요. 근데 급한 것 같아요." 미래가 나를 힐끗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나에게는 들리지 않길 바랐던 것 같지만, 낮춘 목소리는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지난번 그 여자, 다시 나타났대요." 누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환상낙원이?" 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낯설었지만, 누나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저 짧은 단어 하나에 누나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나를 걱정스럽게 보던 그 눈이, 지금은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누나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게 보였다. "도현아, 먼저 집에 가 있어." 누나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오늘 늦을 수도 있어." "누나." "괜찮아." 누나가 억지로 웃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누나 자신도 모르는 것 같았다. "금방 갈게." "환상낙원이 뭔데요." 내가 물었지만, 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한 번 더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누나와 미래가 서둘러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복도에 홀로 남겨진 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만이 조용히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환상낙원. 그 단어가 머릿속에 박혀서 떠나지 않았다. 이름조차 낯선 그 단어가, 왜 이렇게 불길하게 들리는 걸까. 나는 손끝으로 팔뚝을 문질렀다. 소름이 가시지 않았다. 거짓말을 한 죄책감과, 알 수 없는 불안이 동시에 가슴을 짓눌렀다. 누나가 무사히 돌아올까. 그리고 저 단어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나는 텅 빈 복도에 한참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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