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오지 마." 여자가 낮게 말했다. "...위험해."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런데도 위협하듯 말했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골목은 조용했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이며 그녀의 얼굴 반쪽을 비췄다. 아무도 없었다. 이 시간에 이 골목을 지나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을 터였다.
"많이 다쳤잖아요."
"신경 꺼." 그녀가 눈을 다시 감았다. "곧 데리러 올 거야."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데리러 올 사람이 있었다면 진작 왔을 것이다. 이런 골목 바닥에 쓰러져서, 옆구리를 움켜쥔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리 없었다.
숨소리는 점점 얕아지고 있었다. 옆구리를 감싼 손 사이로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손가락 사이로 배어 나온 피가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어젯밤 누나가 흘렸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그녀가 눈을 떴다.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짐승이 상처 입은 채로 마지막 힘을 쥐어짜는 듯한 눈빛. "손대지 마."
"죽어가고 있잖아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없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남자는 나서지 않는 게 미덕이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어떤 여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남자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게 이 세계의 규칙이었고, 나는 그 규칙 안에서 서른두 해를 넘게 살아온 사람의 기억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 세계에 맞춰 살아가려고 애써 왔다.
하지만 나는 이미 손을 뻗고 있었다.
어젯밤과 같은 열기가 손바닥에서부터 시작됐다. 처음엔 미열처럼 시작하더니, 곧 손끝까지 뜨겁게 번졌다.
이번엔 눈에 보였다. 손끝에서 옅은 금빛이 새어 나와 그녀의 옆구리로 흘러 들어갔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빛이 스스로 상처를 찾아 스며드는 것 같았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벌어졌던 살이 맞붙고, 피가 멎었다. 찢어졌던 옷 사이로 드러난 살갗이 매끈하게 변해가는 걸 나는 숨죽인 채 지켜봤다.
여자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뭐야."
그녀가 내 손목을 확 잡았다. 손아귀 힘이 셌다. 아플 정도였다. 방금까지 죽어가던 사람의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너 뭐야. 무슨 능력이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몰랐으니까. 서른두 살의 기억을 가진 채로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부터 이런 힘이 있었는지, 아니면 지금 처음 생긴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어젯밤 누나의 상처를 낫게 했을 때는 얼떨결이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댔을 뿐인데 상처가 나았고, 나는 그저 놀란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었다.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내가 스스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죽어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멀쩡했다. 옷자락을 툭툭 털며 일어서는 동작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검은 단발머리 사이로 목덜미에 새겨진 문신이 언뜻 보였다. 고급스러운 곡선의 문양이었다. 단순한 조직원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딘가 격이 다른 표식처럼 보였다.
"이름." 그녀가 물었다.
"...이도현이요."
"이도현." 그녀가 내 이름을 곱씹듯 말했다. 마치 혀 위에 올려놓고 맛을 보는 것 같은 말투였다. "백하연이야."
백하연. 그녀가 처음으로 이름을 밝혔다.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관심이 섞여 있었다. 사냥감을 살피는 눈빛이랄까. 아니면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한 눈빛이랄까.
"방금 그 힘, 국초국에 신고 안 했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국초국. 이 세계에서 특이 능력을 가진 이들을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다. 그곳에 끌려간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다시는 예전처럼 살 수 없게 됐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신고하면 제가 끌려가요."
"그렇겠지." 하연이 픽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서늘하면서도 어딘가 매혹적인 웃음.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계산된 것 같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걱정 마. 나도 그런 데 신세 지고 싶지 않으니까."
"...왜요?"
"내가 왜 그 얘기를 너한테 해야 하는데."
맞는 말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손목을 놓았다. 손목에 남은 손자국이 벌겋게 도드라졌다. 대신 손끝으로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끝이었다. 방금까지 피를 흘리던 사람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서늘했다.
"근데 너, 재밌네."
"네?"
"목숨 구해준 애가 이렇게 반반하게 생긴 건 처음이라서."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이 세계에서 남자가 이런 말을 듣는 건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짐꾼 취급이거나, 잘해봐야 무해한 존재 취급이었다. 여자들 앞에서 남자는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안전했다. 눈에 띄면 안 됐다. 특히 예쁘장하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는 위험이 배가 됐다. 나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하연의 눈빛에는 그런 걸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사냥감을 발견한 눈빛에 가까웠다. 위험을 감지해야 마땅한 상황인데, 이상하게도 몸이 굳어버렸다.
"저는 그냥..."
"됐고." 그녀가 일어서며 손을 털었다. 옆구리에 있던 옷의 찢어진 자국만 남아 있을 뿐, 상처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를 손으로 한 번 쓸어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하나만 명심해. 오늘 여기서 본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너나 나나."
"...알겠어요."
"약속이야." 그녀가 검지를 세워 보이며 말했다. "어기면 재미없을 거야."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이 골목 저편으로 걸어가다가 멈췄다. 발소리가 뚝 끊겼다.
"이도현." 뒤돌아보지 않고 그녀가 말했다. "또 볼 거야."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아무 흔적도 없었지만, 방금 일어난 일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손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뜨거운 것 같았다. 착각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절대치유.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정확히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이 힘의 이름이 그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생의 기억 어딘가에, 혹은 이 세계에 떨어진 뒤 스쳐 지나간 소문 어딘가에 박혀 있던 단어였다.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국초국. 절대치유. 백하연. 세 단어가 서로 얽히며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힘이 무엇인지, 왜 나한테 생긴 건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늦은 시각인데도 누나는 자지 않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누나의 뒷모습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옆구리의 상처는 이미 다 나은 듯 보였다. 어젯밤보다 훨씬 빨리 나은 것 같았다. 옷 위로도 붕대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다 와." 누나가 물었다.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긴장이 묻어 있었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동작조차 평소와 달랐다.
"그냥... 학교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하지만 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누나의 시선이 내 손을 훑었다. 뭔가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치 손바닥에 무슨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처럼.
"손 좀 보자."
"왜요?"
"그냥."
그냥이라는 말이 그냥으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떨리는 걸 애써 숨기며.
누나가 내 손바닥을 뒤집어 보더니, 이상하리만치 오래 들여다봤다.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살피듯이, 실금 하나까지 확인하려는 듯이.
거실은 조용했다. 시계 초침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누나는 뭔가를 눈치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