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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정도욱과 문석의 일이 잠잠해질 무렵, 정헌은 홀로 저택 뒤편 야산으로 향했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산길은 좁고 가팔랐다. 발밑으로 마른 낙엽이 부스러졌다. '오늘은 인적이 없군.' 정헌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빛이 붉었다. 그곳에는 그만이 아는 작은 동굴이 있었다. 육 년 전, 처음 이 세계에서 무공이라는 것을 익히기 시작하며 발견한 자리였다. 당시 열 살이 채 되지 않았던 그는 저택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까지 걸어왔었다. 어린 몸으로 그 먼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면 우스웠다. '이곳만큼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동굴 입구는 덤불로 가려져 있었다. 정헌은 익숙한 손짓으로 덤불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동굴 안은 좁았지만,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정헌은 천천히 내식을 끌어올렸다. 정가에 전해지는 심법, 현천진결(玄天眞訣). 겉으로는 그저 삼류 무가의 평범한 심법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가 익혀온 방식은 조금 달랐다. '가슴의 문양이 반응할 때마다, 심법의 흐름이 미묘하게 뒤틀린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이상을 눈치채고 있었다. 청동정의 문양이 새겨진 자리, 그곳을 중심으로 기운이 원래의 궤도를 벗어나 낯선 흐름을 그렸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두려움이 앞섰다. 지금은 달랐다. 이제는 그 낯섦을 관찰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 주천. 기운이 단전에서 잔잔하게 돌았다. 이 주천. 흐름이 조금씩 빨라졌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삼 주천을 넘어서는 순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뭔가 다르다.' 정헌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평소와 달리 기운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지 않고, 마치 누군가의 손길이 그것을 이끄는 듯한 감각이었다. '누가··· 아니, 무엇이 개입하고 있는 거지.' 심장이 크게 뛰었다. 한 번, 두 번. 마치 문양이 그 박동에 맞춰 함께 진동하는 듯했다. 그는 의식을 최대한 가라앉히며 그 흐름을 따랐다. 저항하지 않았다. '지금 저항하면 오히려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어.' 육 년간 홀로 무공을 익히며 배운 것이 있다면, 낯선 힘 앞에서 섣불리 맞서지 않는 법이었다. 기운은 그의 단전을 크게 한 바퀴 휘돌더니, 이내 전신의 경맥을 타고 퍼져나갔다. 팔과 다리 끝까지,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낯선 열기가 스몄다. 그 순간, 정헌의 뇌리에 낯선 문자 하나가 스치듯 떠올랐다 사라졌다. 고대의 상형문자, 청동정에 새겨진 것과 같은 형태였다. '뭐지, 방금 그건···' 확인할 새도 없이 감각이 다시 이어졌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응축되는 느낌,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이 서서히 깨어나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 응축은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조여들었다. '서리꽃이 진동하듯···' 정헌은 그 감각을 그렇게밖에 형용할 수 없었다. 시간이 사라진 듯했다. 동굴 안의 공기도, 바깥의 소리도 모두 멀어졌다. 오직 단전 안쪽의 그 응축된 감각만이 선명했다. 정헌은 그 안에서 무언가 형체를 갖춰가는 것을 느꼈다. 형태는 없었으나 분명 존재했다. 마치 얼음 결정이 서서히 자라나듯, 눈에 보이지 않는 무늬가 그의 내부에서 새겨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헌이 눈을 떴을 때, 동굴 밖은 이미 어둠이 짙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천천히 살폈다. '내식의 총량이··· 확연히 늘었다.' 손끝으로 주먹을 쥐어보았다. 예전보다 확실히 무거운 힘이 느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벽에 손바닥을 짚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낯설게 다가왔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감각이 지금은 유난히 선명했다. 마치 감각 자체가 예민해진 듯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간 건가.' 정헌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슴께를 매만졌다. 문양은 다시 잠잠해져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의 감각, 그 낯선 개입의 흔적은 여전히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대체 이 문양은 정체가 뭘까. 전생의 나와는 무관한 물건인데, 왜 이 몸에 새겨져 있는 거지.'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문양이 그의 성장을 돕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배후에 무언가 혹은 누군가의 의지가 있다는 것. 정헌은 동굴 입구로 걸어가며 생각을 이어갔다. '만약 이것이 누군가의 의도라면, 그 의도의 끝은 무엇일까.' 단순한 호의는 아닐 것이다. 세상에 대가 없는 힘은 없었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 이치였다. 정헌은 동굴을 나서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 하나 없는 하늘, 짙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문득 전생의 기억 한 조각이 스치듯 떠올랐다. 도시의 불빛, 늦은 밤 홀로 걷던 골목길,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했던 무언가.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 헤드라이트 불빛이 시야를 가득 채우던 순간. 그리고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이 몸, 이 세계였다. '그때 그 사고가··· 결국 여기로 이어진 건가.' 그는 그 생각을 오래 붙들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였다. 산길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어둠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정헌을 정명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등불을 든 그의 얼굴에는 옅은 걱정이 서려 있었다. "공자님, 늦으셨습니다." "수련이 길어졌다." 정명석은 그의 얼굴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좋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정헌의 낯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오랜 시간 곁을 지킨 그는 단번에 알아챘다. 정헌은 옅게 웃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 같다." 정명석의 눈이 커졌다. "그것 참 경사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낯빛이었다가 이내 표정을 고쳐 세웠다. "헌데···" 그가 말끝을 흐리자 정헌이 물었다. "뭔가." "서주 상단 건 말입니다. 배후를 조금 더 캐냈습니다." 정헌은 자리에 앉으며 손짓했다. "말해봐." 정명석은 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촛불 아래 빼곡히 적힌 글씨가 드러났다. "서주 거성의 한 장로가 직접 개입한 정황이 있습니다. 이름은 아직 확인 중입니다만, 정가의 정보망을 탐색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입니다." 정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운문 산하 거성의 장로가 직접, 이렇게 이른 시기에.' 그는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삼류 무가에 불과한 정가에, 거성의 장로급 인물이 손을 뻗을 이유는 흔치 않았다. "이유는." "짐작이지만··· 삼 개월 뒤 있을 제자 모집 시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각 성마다 유망한 인재들을 미리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정헌은 잠시 침묵했다. 촛불이 흔들리며 정명석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길게 일렁였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이미 그들의 명단에 올라 있을지도 모르겠군.' 어젯밤 창고에서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지붕 위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그 그림자. 그때의 기척은 분명 예사롭지 않았다. 인기척 하나 없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존재했다. 정헌은 그 순간의 서늘함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정체불명의 감시자는." 정명석이 흠칫했다. "감시자라니요?" "어젯밤, 내가 떠난 뒤 창고 근처에 누군가 있었다." 정명석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종이를 접어 다시 품에 넣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혹여 서주 쪽에서 보낸 자일지도 모릅니다." "서둘러." "예." 정명석이 물러가고, 정헌은 홀로 방 안에 남았다. 촛불 하나만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는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청동정의 문양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러나 정헌은 그 고요함 아래 무언가가 서서히 깨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손끝에 닿는 옷감 아래로, 문양이 새겨진 살갗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매끄러웠다. 하지만 정헌은 알고 있었다. 저 안쪽 깊은 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세 달. 그 안에 준비를 끝내야 한다.' 그는 창밖을 응시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어둠 속 저택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저편 어딘가에서,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선 하나가 여전히 그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헌은 촛불을 끄지 않은 채 자리에 누웠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어젯밤 지붕 위의 그림자였다. 그 정체가 무엇이든, 삼 개월 후의 시험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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