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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정가의 저택은 새벽빛이 스며들 무렵에야 고요를 되찾았다. 담장 너머로 닭 울음이 들려왔다. 아직 어스름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하늘 아래, 별채로 향하는 정헌의 발걸음은 소리 하나 없었다. 그림자처럼 움직이던 사내가, 지붕을 넘고 담을 타던 자가, 지금은 그저 조용한 걸음으로 자신의 처소를 향해 걷고 있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정헌은 겉옷을 벗어 던지듯 걸어놓고, 대야에 받아둔 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밤사이 묻은 흙먼지와 핏자국 몇 점이 물에 씻겨나갔다. 옷을 갈아입는 손길은 익숙했다. 검은 야행복을 벗고, 담청색 학창의를 걸치자 어깨의 선이 부드럽게 변했다. 허리춤에 매달아 두었던 짧은 검 대신, 옥으로 장식된 접선 하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거울 앞에 선 정헌은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매는 여전했고, 입가의 선도 그대로였다. 다만 그 안에 담긴 무언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삶도 이제 익숙하군.' 그는 옅게 웃었다. 웃음 끝에 남은 씁쓸함은 굳이 지우지 않았다. 밤새 회수한 장부는 이미 명석의 손에 넘겨진 뒤였다. 서주 상단이라는 이름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단순한 상단의 비리 장부치고는, 지키던 자들의 움직임이 너무 정교했어.' 검을 쓰는 방식도, 도주하던 경로도, 그저 돈을 지키려는 자들의 것이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대청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청에는 이만호가 서 있었다. 오십 대의 중년, 흰머리가 관자놀이에 성성했지만 등은 곧았고 눈빛은 형형했다. 젊은 시절 강호에 이름을 날렸다는 소문이 아주 헛것은 아닌 듯, 그가 서 있는 자세 하나에도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런 이만호가 정헌 앞에서만큼은 늘 허리를 곧게 세우고 지극한 존댓말을 썼다. "공자님, 어젯밤 일은 잘 마무리되셨습니까." 정헌은 대청 안으로 들어서며 자리에 앉았다. 이만호가 미리 우려둔 차가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장부는 회수했습니다. 서주 상단 쪽이더군요." 이만호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 미묘한 변화를 정헌은 놓치지 않았다. "서주라면, 영운문 산하 거성과 가까운 곳입니다.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압니다." 정헌은 짧게 답하며 찻잔을 들었다. 차향이 코끝을 스쳤다. 뜨거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에, 밤새 곤두섰던 신경이 조금씩 풀렸다. 이만호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자들의 검로가 예사롭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보셨습니까." "아이들에게 들었습니다. 공자님 몰래 뒤를 밟았다는 놈이 하나 있더군요." 정헌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낮게 웃었다. "간이 부었군요." "충심이 지나친 것이지요." 이만호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만 그 아이 말로는, 서주 쪽 무사들의 보법이 일반 상단 호위와는 격이 달랐다고 합니다." "저도 그리 느꼈습니다." 정헌의 눈빛이 잠시 가라앉았다. '단순한 장부 회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가주님께서 공자님을 부르셨습니다. 아침 식사 후에 서재로 오시라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만호가 물러가는 뒷모습을 보며, 정헌은 남은 차를 마저 비웠다. 찻잔 바닥에 가라앉은 찻잎이 마치 오늘 하루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정헌은 서재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동안 하인들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정가의 외아들, 정천호의 후계자를 대하는 이들의 눈빛에는 존경과 어렴풋한 어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서재 문을 열자 익숙한 묵향이 코끝을 스쳤다. 정천호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운천성의 성주이자 정가의 가주, 그 얼굴에는 세월의 무게가 짙게 배어 있었다. 창으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그의 흰 수염을 옅게 물들였다. "왔느냐."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정천호는 서류를 내려놓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언제 봐도 속을 읽을 수가 없군.' 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한 어조를 유지했다. "어젯밤 일은 들었다. 장부를 되찾았다고." "예." "수고했다. 허나 앞으로는 명석이만 보내도 될 일이다. 네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어." 정헌은 고개를 저었다. "제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됩니다." "고집은 여전하구나." 정천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천호는 잠시 아들을 응시하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아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위험한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것을. 밤마다 사라지는 기척, 새벽녘에야 돌아오는 발걸음, 나이에 걸맞지 않은 눈빛까지. 그러나 캐묻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이 아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정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가의 너른 마당, 아침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석 달 뒤 영운문의 제자 모집 시험이 있다." 정헌의 눈빛이 처음으로 미묘하게 흔들렸다. "영운문에서 직접 인재를 모집한다는 겁니까." "그래. 삼 년에 한 번 있는 큰 행사다." 정천호가 몸을 돌려 아들을 바라보았다. "삼천 년을 이어온 그 문파가, 자기 발로 세상에 그물을 던지는 셈이지. 삼 개 신성, 십오 개 거성, 백오십 개 상규성 전역에서 재능 있는 아이들이 모여든다. 정가에서도 응시자를 낼 생각이다."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정천호는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자랑과 걱정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네 뜻대로 하거라.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정헌은 잠시 침묵했다. '영운문이라···' 삼천 년 역사의 거대 문파, 그 그늘 아래 있는 것과 그 안으로 직접 발을 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 문파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강호의 절반이 고개를 숙인다는 소문을 정헌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기회일 수도, 함정일 수도 있겠지.' "응시자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매회 수천을 헤아린다고 들었다. 그중 정식 제자로 뽑히는 수는 백에도 미치지 못한다지." "경쟁이 치열하겠군요." "단순히 무공만 보는 것이 아니라 들었다. 자질, 근성, 배경까지 두루 살핀다더군." 정천호가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정가로서도 이 기회를 놓치기 아까운 것이지. 만약 우리 가문에서 영운문의 제자가 나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성 내에서 정가의 위치가 달라질 것이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하거라." 정헌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서재를 나섰다. 문을 닫는 손끝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서재를 나선 정헌은 곧장 뒷마당의 별채로 향했다. 걸음이 빨라졌다. 아침 햇살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마당에는 훈련하는 아이들의 기합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정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별채에는 정명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십 대 초반의 사내, 날카로운 눈매와 마른 체구가 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했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정헌은 자리에 앉았다. "말해." "육 년 전부터 키운 아이들 말입니다. 지금은 삼백을 넘겼습니다. 그중 실력이 상위권인 자들은 이미 성 내 각 요처에 은밀히 배치를 마쳤습니다." "정보망은." "운천성 내는 물론 인근 세 개 현까지 뻗쳤습니다. 다만···" 정명석이 잠시 말끝을 흐렸다. 정헌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 그의 침묵이 오히려 정명석을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서주 쪽 상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단순히 장부를 노린 게 아니라, 정가 내부의 정보 자체를 캐려는 낌새입니다." "근거는." "어젯밤 회수한 장부 외에도, 최근 두 달 사이 정가 소속 상행이 세 차례나 미행을 당했습니다. 처음엔 우연이라 여겼습니다만, 그 패턴이 지나치게 일정합니다." "누가 뒤에 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만, 짐작 가는 곳이 하나 있습니다." 정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지." "영운문 산하, 서주 거성의 한 갈래입니다." 정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며든 바람이 서류 더미 한 귀퉁이를 살짝 흔들었다. '벌써부터 영운문 쪽에서 정가를 주시하고 있다는 건가.' 그는 속으로 되뇌며 창밖을 응시했다. '내가 아직 세상에 이름조차 알리지 않았는데.' "확실한 건 아직 없다는 뜻이군." "송구합니다. 다만 심증은 짙습니다." "심증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어. 좀 더 파봐." "예." "단, 이쪽에서 먼저 흔적을 남기지 마라. 그들이 우리를 살피고 있다면, 우리가 그들을 살피고 있다는 걸 절대 알아채선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정명석이 물러가고, 정헌은 홀로 남았다. 육 년 전,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자신이 처음으로 고아 백 명을 거두어들이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그날의 진흙탕 골목, 굶주려 눈빛만 형형하던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그날의 선택이 지금 이렇게 자라날 줄이야.' 그는 씁쓸하면서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창밖으로 정운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열세 살의 소년, 정헌을 늘 '큰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아이였다. 통통 튀는 걸음걸이만 봐도 이미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졌다. "큰형님!" 정운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저고리 자락은 급히 뛰어온 탓인지 흐트러져 있었다. 정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뭔가.'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정운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말해봐." 정운은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저기··· 큰일 났어요!" "숨부터 돌려." "아니에요, 지금 가셔야 해요!" 정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인들 숙소에서··· 도욱 형님 쪽 사람들이 아이들을 때렸어요! 예전에 큰형님이 거두신 그 아이들이요!" 정헌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방금까지 남아 있던 미소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졌다. "어느 아이들이지." "제, 제일 어린 축이요. 곡물 창고 옆에서 일하던 애들이요!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인데, 아무도 나서질 못하고···" 정헌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미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명석에게 알려. 지금 당장." "예, 형님!" 정운이 급히 몸을 돌려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헌은 별채를 나서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 서린 냉기는 조금도 녹지 않았다. '도욱이라, 벌써부터 선을 넘는군.'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하인들 숙소로 향하는 그 짧은 거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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