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며칠이 지났다.
태자궁의 하루는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아침이면 소은이 세숫물을 들이고, 정오에는 볕이 서재 창턱까지 스며들고, 저녁이면 등불이 하나둘 켜졌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대신들의 발걸음이 태자궁에서 멀어졌고, 예전 같으면 문안 인사를 오던 이들도 이제는 발걸음을 끊었다.
문 앞을 지키던 궁인들의 수마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전하, 오늘도 조회에 참석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소은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서책을 넘기며 짧게 답했다.
"폐무혼인 나를 굳이 부를 이유가 있나."
말투는 가벼웠지만, 그 안에는 실제로 계산된 여유가 담겨 있었다.
소은은 더 묻지 않고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서책 위로 흐릿하게 번졌다.
(이대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지금은 최선이다.)
섭정대군들의 눈 밖에 있는 것이 오히려 안전했다.
대천국의 실질적인 권력은 지금 세 명의 섭정대군이 나누어 쥐고 있었다.
북천대군, 남화대군, 서정대군.
선황이 서거한 지 3년, 어린 황제 대신 이 셋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중 북천대군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그의 뒤에는 군권을 쥔 무장들이 있었고, 그의 딸 유설아를 통해 궁내 여러 인맥까지 손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 이서광도 그의 편이다.)
전생에서 서광이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북천대군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이었다.
그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
(이번 생에는 같은 결과를 만들지 않는다.)
서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 안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바람이라도 쐬어야 할 것 같았다.
그날 오후, 나는 정원을 걷다가 이장신을 마주쳤다.
각성식 이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장신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형님... 아니, 전하."
호칭이 바뀐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편하게 형님이라 부르던 그가, 이제는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 짧은 머뭇거림 속에 그가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편하게 불러도 된다."
내가 말했지만 장신은 시선을 피하며 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끝이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폐무혼이 된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는 거겠지.)
서운함보다는 이해가 앞섰다.
각성식의 결과는 이 세계에서 신분과도 같은 무게를 지녔다.
무혼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그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견고했다.
"검치호로 각성했다지. 축하한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장신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네! 아버님께서도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가 두 팔을 살짝 벌리며 자랑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검치호는 그리 흔한 무혼이 아니라고, 스승님께서도 놀라셨습니다."
그러다 잠시 머뭇거리며 표정을 가라앉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폐무혼이라는 게, 저는 사실 잘 모르지만..."
나는 짧게 웃었다.
"괜찮다. 걱정 마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네가 알 날이 오겠지.)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장신은 뭔가 더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결국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
장신이 자리를 뜨고, 나는 다시 정원을 걸었다.
매화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의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엊그제의 요기 사건이나 밤의 이상 징조가 무색하게, 세상은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며 잔잔한 소리를 냈다.
벤치 옆으로 벌 한 마리가 낮게 날아들었다가 다시 멀어졌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하지만 그 평화가 오래갈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등줄기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날의 요기는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생각이 자꾸 그쪽으로 흘렀다.
순수한 요기가 형체를 이루어 나타나는 것은 전생의 기억에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태자궁 근처에서, 각성식이 열리는 바로 그날 나타났다는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려웠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풀어놓은 것이라면.)
그 배후에 누가 있을지는 짐작이 갔다.
북천대군.
각성식장 외곽에서 목격된 그의 사람들.
그리고 그 직후에 나타난 요기.
연결선이 너무 뚜렷했다.
하지만 확신할 증거는 없었다.
(서둘러 판단하지 말자.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지금은 폐무혼이라는 위장 아래 몸을 숨기고, 천용령의 진짜 힘을 파악하며 힘을 기를 때였다.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면, 전생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 뿐이었다.
그때, 정원 저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자 전하."
돌아보니 유설아가 서 있었다.
각성식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옅은 하늘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바람에 옷자락이 살랑거렸다.
머리에 꽂힌 작은 비녀가 햇빛을 받아 잠깐 반짝였다.
평화로운 풍경이었지만, 나는 그 평화로움 속에서 미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여긴 어떻게 왔지."
내가 물었다.
목소리에 경계심이 배어 있었다.
유설아가 옅게 웃었다.
"아버님 심부름으로 궁에 들렀다가, 전하께 인사드리고 싶어서요."
(북천대군의 심부름이라. 그럴듯한 명분이군.)
나는 그녀를 응시했다.
15세 소녀의 얼굴에 순수함이 가득했다.
그 얼굴 어디에도 계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전생의 배신을 알기 전이라면, 나 역시 저 얼굴에 무너졌을 것이다.
"각성식에서...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어요."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폐무혼이라니. 전하께서 얼마나 상심이 크셨을지..."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긴 듯 들렸다.
그녀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연기라고 해도 완벽하지.)
나는 씁쓸한 확신을 삼켰다.
"괜찮다. 걱정할 것 없다."
짧게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전하."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혹시... 최근에 이상한 일 없으셨나요?"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상한 일이라니.)
그녀의 눈동자를 살폈다.
표면적으로는 순수한 걱정처럼 보였지만, 그 안쪽 어딘가에 다른 것이 숨어 있는 듯했다.
그 눈빛이 나를 향해 있었지만, 정작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말이지."
내가 되물었다.
유설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그냥... 요즘 궁 안에 이상한 소문이 많아서요."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손끝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매만졌다.
(요기 사건을 알고 있다는 건가. 아니면 그것과 관련된 뭔가를 파악하려는 건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경계심이 더욱 짙어졌다.
전생에서도 그녀는 이렇게 조용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정보를 캐냈다.
그것이 그녀의 진짜 재능이었다.
그녀의 미소 뒤에서 몇 번이나 사람이 죽어나갔는지, 지금 이 자리에 선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별일 없다."
나는 짧게 답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그녀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걸음을 옮기며 나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다시 시작되는 건가.)
몇 걸음을 더 걷고 나서야 겨우 숨을 골랐다.
태자궁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의 태양이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 아래 드리운 그림자가, 어쩐지 예전보다 훨씬 짙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북천대군의 움직임, 요기의 등장, 그리고 유설아의 접근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방향을 향해 조여오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회랑을 지나는 동안, 궁인들의 시선이 잠깐씩 나를 향하다가 이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을 사소한 것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마음에 걸렸다.
그날 밤, 서재 서랍 속에 넣어둔 천용령을 다시 꺼내 들었다.
짙푸른 빛의 옥패가 손끝에서 차갑게 빛났다.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등불 아래 은은하게 일렁이는 듯 보였다.
(이걸 쓸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달빛 아래, 나는 옥패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 안에 어떤 힘이 잠들어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손바닥에 얹은 옥패에서 미약한 파동이 스치듯 느껴진 것도 같았다.
착각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짧고 낯선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 힘을 깨워야 할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창밖 어딘가에서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고 지나갔다.
그 소리가 유독 오늘 밤, 평소보다 조금 더 날카롭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