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궁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각성식이 열리는 날인데도 흥겨운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새벽부터 풍악 소리가 울리고, 시녀들이 들뜬 목소리로 오가며 옷감을 나르는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조차 어딘가 서늘했다.
바람이 창틀을 스치는 소리마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삐걱거리는 듯한, 낯선 파문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시녀들의 발걸음도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발끝을 세운 채 걷는 것처럼,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그 낌새를 놓치지 않았다.
(어제 그 파문 때문인가.)
옷고름을 매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전하, 준비되셨습니까."
소은이 문밖에서 물었다.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차분했지만, 그 안에도 어딘가 긴장이 배어 있었다.
나는 옷매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됐다. 나가자."
문을 열고 나서자, 회랑을 따라 늘어선 시녀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 침묵의 무게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각성식장으로 향하는 길, 관측사들이 모여 있는 천문각을 지나쳤다.
평소라면 그들도 각성식을 지켜보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텐데, 오늘은 몇이 남아 하늘을 관찰하고 있었다.
망원경 비슷한 도구를 하늘로 향한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관측사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미간이 잔뜩 좁혀져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아침 햇살 아래 반짝였다.
그 옆의 다른 관측사가 낮게 속삭였다.
"이런 기류는 처음 봅니다."
"조용히 해. 각성식에 지장 줄라."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듯 얽혔다가, 이내 각자 하늘로 돌아갔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들의 대화를 흘려들었다.
(이상 기류라. 그것도 전생에 없던 일이지.)
어긋남이 하나씩 쌓여가고 있었다.
작은 것들이었지만, 그 작은 것들이 모여 무언가를 예고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느낌이 더 선명해졌다.
각성식장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황족과 대신들, 그리고 오늘 각성식을 치를 소년소녀들.
붉은 융단이 단상까지 길게 깔려 있었고, 그 위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어 붉은빛과 금빛이 뒤섞인 채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그중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이서광.
내 이복동생이자, 전생에서 나를 배신으로 몰아넣었던 첫 단추.
그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금실로 수놓은 예복 소매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반짝였다.
"형님도 오셨군요."
서광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목소리에는 이미 승자의 여유가 섞여 있었다.
"오늘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말은 정중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조롱이었다.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간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짧게 웃었다.
"너도."
그 짧은 대답에 서광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여유로운 미소로 돌아갔다.
(저 미소, 전생에서도 저랬지.)
그의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유설아가 서 있었다.
오늘도 그녀는 맑고 우아했다.
옅은 하늘색 치맛단이 바람에 살랑거렸고, 머리에 꽂은 작은 꽃 장식이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15세 소녀의 얼굴에 아직 세상의 어떤 악의도 담기지 않은 듯한 순수함이 배어 있었다.
(저 얼굴이 언젠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얼굴이라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나는 시선을 거두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각성식이 시작되었다.
단상 위로 관측사 대표가 올라 짧은 축문을 읽었다.
목소리가 장내에 낮게 퍼졌다.
그가 물러나자, 한 명씩 단상에 올라 무혼석에 손을 얹었다.
무혼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색과 형상이 그 사람의 무혼을 알려주었다.
이장신이 먼저 올라갔다.
그의 발걸음에는 긴장이 묻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
손을 얹자 은빛 광채가 일었고, 그 안에서 검을 문 호랑이의 형상이 떠올랐다.
"검치호! 황품 6급!"
관측사가 외쳤다.
장신이 환호했다.
주변에서 축하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예상대로군.)
나는 그 결과를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전생의 기억과 정확히 일치하는 결과였다.
다음은 이서광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예복 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가 손을 얹자 무혼석이 강렬하게 빛났다.
붉은 광채 안에서 거대한 짐승의 형상이 드러났다.
용의 이빨을 가진 사자와 같은 형상이었다.
빛이 장내를 온통 붉게 물들였다.
"현종 9급! 파룡사!"
장내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여기저기서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현종급은 흔치 않은 등급이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낮은 속삭임이 오갔다.
"현종급이라니, 저 나이에."
"이서광 공자, 앞날이 밝겠군."
서광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에 희열이 가득했다.
마치 자신의 우위를 확인받으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전생과 같은 시기에 같은 무혼이라니.)
나는 그것이 오히려 안도스러웠다.
적어도 이 부분은 아직 어긋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수많은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해 쏠렸다.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단상에 올라 무혼석에 손을 얹었다.
돌의 표면이 서늘하게 손바닥에 닿았다.
그 순간, 몸속 깊은 곳에서 익숙한 파동이 일었다.
동황종의 존재감이었다.
거대한 힘이 혈관을 타고 역류하듯 치솟았다.
(억눌러야 한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 힘을 안으로 눌러 담았다.
이마에 땀이 배어 나왔다.
손끝이 미세하게 저려왔다.
무혼석이 희미하게 빛나다가, 곧 흐릿한 유리병의 형상을 토해냈다.
빛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관측사가 놀란 눈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그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황품... 1급... 폐무혼입니다."
장내가 얼어붙었다.
정적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침묵이었다.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그 안에 담긴 것은 경악과 실망, 그리고 노골적인 조소였다.
누군가 낮게 헛기침을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대놓고 고개를 젓기까지 했다.
서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형님... 안타깝게 되셨군요."
말투는 위로하는 듯했지만, 그 말이 채찍처럼 등을 후려쳤다.
그 순간, 각성식장 외곽에서 낮은 움직임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 몇이 기둥 뒤로 몸을 숨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지만, 어딘가 훈련된 절제가 느껴졌다.
북천대군의 사람들이었다.
(왜 저들이 이 자리에 있는 거지.)
의문이 스쳤지만, 답을 구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유리병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계획대로다. 계획대로... 인데.)
왜인지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십만 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다시 시작한 이 삶에서, 폐무혼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예상보다 훨씬 씁쓸했다.
단상 아래로 내려서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각성식장 밖으로 걸어나가는 그 짧은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수많은 시선이 등 뒤에 꽂혔다.
몇몇은 대놓고 수군거렸고, 몇몇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중 하나, 유설아의 시선이 유독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나는 느꼈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이유가 없었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등 뒤의 그 시선이 점점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시선 속에 담긴 감정이 단순한 경멸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왜인지 알 수 없는 불편함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낯선 파문이, 아까 관측사들이 속삭이던 이상 기류처럼, 가슴 한켠에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