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유리병 속 잠든 용

1화

새벽 공기가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눈을 뜨기도 전에 그 냄새를 먼저 알아챘다. 마른 나무와 향목이 뒤섞인, 태자궁 특유의 냄새였다. (또 이 냄새로 아침을 맞는구나.) 이불 속에서 손끝이 먼저 움직였다. 비단의 결이 손가락 사이로 스쳤다. 십만 년 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감촉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십만 년 후에는 잊고 지낸 감촉이었다.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용의 발톱을 형상화한 조각이 새벽빛을 받아 옅은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십만 년의 시간을 건너뛴 뒤에도 여전히 낯설었다. 아니, 낯설다기보다는—그리웠다는 게 더 맞았다. 천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조각의 결마다 그림자가 얕게 스며 있었다. 그 그림자를 눈으로 따라가다 보니, 문득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몸을 일으키자 옆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발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규칙적이었다. "태자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시녀 소은의 목소리였다. 나는 짧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소은이 세숫물을 들고 들어왔다. 대야에서 옅은 김이 피어올랐다.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얼굴에 아직 앳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전생에는 눈여겨본 적 없던 얼굴이었다. 지금은 하루도 빠짐없이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오늘이 각성식 전날이군요." 소은이 세숫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일이면 전하께서도 무혼을 얻으시겠지요." 그 말을 하는 소은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어린 시녀에게는 그것이 축제 전날의 설렘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물에 손을 담그며 짧게 웃었다. "그래, 내일이면." (이미 알고 있는 결말이지만.) 괄호 안의 생각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십만 년 전, 아니 정확히는 다음 생에서—풍류대제로 불리던 시절, 동황종의 힘을 다시 얻기까지 겪었던 그 지독한 세월을 이 아이는 알 리 없었다. 물속에 손을 담근 채로 잠시 그 시절의 감각을 더듬었다. 피와 흙냄새, 끝없이 이어지던 전장의 밤들. 지금 이 대야의 물처럼 맑고 고요한 것과는 거리가 먼 시간이었다. 세숫물에 얼굴을 씻고 나자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차가운 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서늘한 감각이 오히려 반가웠다. 창밖으로 태자궁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매화나무 몇 그루가 이른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꽃잎이 채 피지 않은 봉오리들이 가지 끝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평온한 풍경이었다.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그 평온함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바람이 한 번 더 불자 가지 끝이 흔들렸고,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 평온함이 언제까지 갈까.) 아침 수업을 마치고 나는 정원을 걸었다. 돌길을 밟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장신이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형님, 내일이면 저도 각성식을 치릅니다!" 장신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분가의 소년답게 그는 언제나 자신만만했다. 그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전생의 장신이 겹쳐 보였다. "검치호 무혼이 나올 것 같다고 다들 그러던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치호라. 나쁘지 않은 무혼이지.) 전생에서도 장신은 검치호를 얻었었다. 그리고 그 무혼으로 평생 나를 따랐다. 지금도 그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길을 걷는 동안 장신은 계속 말을 이었다. 자신이 각성식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지, 어떤 옷을 입을지까지 세세하게 늘어놓았다. 나는 그 말을 절반쯤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흐릿했다. "전하께서는 무슨 무혼이 나올 것 같으십니까?" 장신이 물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매화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얼굴에 닿았다. 따뜻했다. "글쓰... 나도 모르지." 짧은 대답이었다.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동황종. 십만 년 후 세계를 지배했던 신급을 초월한 무혼. 지금 이 몸에 깃들어 있으나, 내일 각성식에서 그것은 절대 드러나지 않을 것이었다. 장신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에이, 전하도 참. 그래도 짐작은 있으시잖아요." "짐작이 뭐가 필요해. 내일 되면 알 텐데."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장신의 발소리가 다시 붙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내일도, 그다음도—이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어야 한다.) 그날 저녁, 태자궁의 저녁 식사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수저 소리만 규칙적으로 방 안을 채웠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서재에 앉아 옛 서책을 뒤적였다. 전생의 기억이 맞는지 확인하는 습관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서 마른 종이 냄새가 났다. 각성식 전날 밤에는 늘 하늘에 별의 흐름이 이상해진다는 기록이 있었다. (내일 밤이겠지.) 서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았다. 별들이 여느 때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늘 한쪽에서 낯선 파문이 일었다. 마치 물결이 하늘을 스치듯, 별빛 사이로 옅은 떨림이 지나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저건... 뭐지.) 파문은 잠시 멈춘 듯하다가, 다시 한 번 삐걱거리는 듯한 결로 흔들렸다. 익숙한 별자리 하나가 그 흔들림 속에서 자리를 놓친 것처럼 보였다. 전생의 기억에는 없는 장면이었다. 각성식 전날 밤에 하늘에 이런 이상 현상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었다. 뭔가 어긋난 것이다. 십오 년 전 죽었어야 할 내가 되돌아온 시점부터, 이미 이 세계는 내가 알던 것과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그래, 처음부터 완벽히 같을 리 없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그 파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나는 창틀에 손을 얹고 한동안 그 자리를 응시했다. 바람이 창틈으로 새어 들었다. 그 바람 속에 아까와는 다른, 옅은 이물감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궁녀들 몇이 하늘을 가리키며 술렁이고 있었다. "저것 보셨어요? 방금 하늘이..." "아니, 그냥 별똥별 아니었어?" "그런 게 아니었어요. 색이 이상했다구요." "색이요? 무슨 색이었는데요?" "검붉었어요. 순간이었지만 확실히 봤어요." 그들의 목소리에는 옅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나는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다들 느꼈다는 건가.)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날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불 속에서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유설아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던 순간, 거기에 담겨 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연민조차 아니었다. 그저 임무를 완수했다는 안도였다. (그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니.)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십만 년의 시간을 건너와도 그 서늘함만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늘의 별들은 다시 잔잔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무언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까 본 그 파문, 그리고 궁녀들이 보았다는 검붉은 빛. 전생의 기록에는 없던 조각들이 하나둘 이 세계에 끼워지고 있었다. 내일, 각성식이 열리는 그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이제는 나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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