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물장수 소년, 목숨을 걸다

5화

붉은 달이 창틀 위로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도, 나는 계산대에 앉은 채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는데, 방금 전까지 다섯 명의 무장한 사내들을 두 손으로 쓰러뜨린 몸이 아직도 얼얼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으며, 동시에 이 흥분의 근원이 다름 아닌 내 안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내민 어떤 힘이라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으면 조금 전의 장면이 그대로 재생되었다. 첫 번째 사내의 칼을 손등으로 튕겨내던 순간의 파그작 하는 소리, 두 번째 사내의 갈비뼈에 주먹이 박히던 퍼억 하는 소리,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거의 동시에 처리했던 것 같은데 그 부분은 기억이 흐릿했다. 마치 몸이 먼저 반응하고 머리가 뒤늦게 따라온 느낌이었다고 할까. 다섯 번째 사내가 도망치려다 문짝을 부수고 나간 게 지금 이 부서진 틈으로 붉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이유였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이거 꼭 무슨 핏빛 커튼콜 같잖아'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그 생각에 헛웃음을 흘리며 장부를 뒤적이는 척했다. 사실 장부를 보는 척한다고 해서 숫자가 눈에 들어올 리는 없었다. 47일. 그 숫자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깜빡거렸다. 시한부 목숨이라는 게 이렇게 사람을 산만하게 만드는구나, 싱거운 감상을 곱씹으며 나는 손끝으로 계산대 나무결을 문질렀다. 오늘 하루, 이 힘 하나 때문에 며칠어치 수명을 깎아먹은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슬쩍 스쳤지만, 그 불안을 계산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냥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걱정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으니까. 그로부터 두어 시간쯤 지났을 무렵, 곽태웅이 홍아영과 함께 다시 객잔으로 돌아왔다. 대곰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그는 여전히 술 냄새를 은은히 풍기고 있었는데, 그 커다란 몸에서 나는 술기운마저 이제는 익숙한 향기처럼 느껴져서 나는 새삼 이 사막 생활이 길었다는 걸 실감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발소리부터 이미 익숙했으니, 이 정도면 거의 한 식구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잠깐 스쳤다. "습격자들 처리는 잘 끝냈수?" 하고 내가 묻자, 곽태웅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입은 잘 열더군요. 돈 몇 푼 쥐여주니 저희 두목보다 더 술술 불었습니다." "그 정도로 쉽게 불 정도면 애초에 충성심이란 게 있긴 했던 거요?" 내가 되묻자 곽태웅은 껄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소백 님도 아시잖습니까. 사막에서 충성심은 물보다 귀합니다. 그리고 물보다 쉽게 마릅니다." 그 말에 나는 픽 웃었다. 확실히 이 남자와 대화하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놓이는 부분이 있었다.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우렁찬데다 말투도 시원시원해서, 이 살벌한 사막 한복판에서 유일하게 여유를 잃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럼 그 정보, 나도 좀 나눠줘야 하지 않겠수?" 하고 내가 되묻자, 홍아영이 베일 아래로 옅게 웃는 기색을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웃음은 언제나 베일 너머로 흐릿하게만 보였지만, 그 흐릿함 속에서도 눈매만은 유독 또렷하게 반짝였다. "북부 상단 연합 쪽 사병들이었어. 그쪽에서 상고 보물의 각성 소식을 제일 먼저 물어들은 모양이야." 북부 상단 연합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곧바로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보았는데, 그들의 거점이 이곳 오아시스에서 최소 열흘 거리는 떨어져 있다는 걸 감안하면, 그들이 이렇게 빠르게 사람을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심상치 않은 위기의 신호였다. 간단한 계산이었다. 열흘 거리를 사람이 걸어서 좁히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최소 대엿새는 걸릴 텐데, 오늘 습격이 일어났다는 건 이미 그전부터 정보를 물어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열흘 거리를 이미 좁혀놓고, 게다가 나에 대한 소문까지 물어 왔다는 뜻이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서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근데 소백, 그게 다가 아니야." 홍아영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힘을 쓴 게, 벌써 다른 쪽에도 흘러들어갔다는 거지." [알림: 상고 보물의 계약자가 힘을 발현했습니다. 일부 세력에게 전파됩니다] 나는 이 메시지를 이미 한 번 확인한 바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전파되었는지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으므로, 홍아영의 입을 통해 그 실체를 듣는 편이 훨씬 살에 와닿았다. 알림창이라는 게 참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필요한 정보는 안 주고, 이렇게 사람 속만 태운다니까. "동쪽 세 부족이 다 술렁이고 있어. 남쪽 용병단도 벌써 척후를 풀었다는 소문이 있고." 홍아영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정리하듯 말했다. 그 손가락이 하나씩 접힐 때마다 나는 속으로 하나씩 한숨을 쉬었다. 동쪽, 남쪽, 그리고— "그리고... 마왕의 부하들도,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손끝으로 장부의 모서리를 꾹 눌렀다. 손끝에 나무 모서리가 파고드는 감각이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왕이라니.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반가움이 아니라 곤란함이었다. 요컨대 그와의 인연이란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결코 좋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성질의 것이었으니까. 그렇다고 그 인연을 없었던 일처럼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 여파가 지금처럼 계속 나를 따라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는데, 지금 보니 그 바람은 이미 물 건너간 모양이었다. "소백, 너 그쪽이랑 무슨 사이인지 말 안 해줄 거야?" 홍아영이 베일 아래에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시선이 묘하게 집요해서, 나는 잠깐 딴청을 부리듯 장부를 한 장 넘겼다. "나도 몰라. 나도 그냥 지나가는 인연이야."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그 대답이 얼마나 허술한지는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대답에 곽태웅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나가는 인연이 사막 최강의 세력이라니, 그건 좀 무섭수다." "지나가는 인연치고는 꽤 오래 지나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홍아영이 옆에서 짧게 덧붙였다. 나는 그 말에도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나는 그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왕의 세력이란, 이 대사막에서 감히 정면으로 부딪힐 상단도 부족도 없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했으며, 그들이 나를 노린다는 것은, 곧 이 오아시스의 평화가 며칠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47일이라는 시한이 이미 며칠 줄어들었다는 사실보다, 이 소식이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애초에 죽음이라는 게 시한이 정해져 있어서 무서운 게 아니라, 그 시한이 언제 갑자기 앞당겨질지 모른다는 점이 더 무서운 법이었으니까. "그럼, 마왕 쪽에서 직접 이곳으로 올 가능성도 있는 거야?" 하고 내가 묻자, 홍아영은 잠시 망설이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부하들만 풀어놓은 수준이야. 하지만 시간 문제겠지." "시간 문제라는 말, 요즘 너무 자주 듣는 것 같지 않수?" 곽태웅이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넘기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최근 들어 '시간 문제'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세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그 뒤로도 한동안 대책을 논의했다. 오아시스를 떠나는 게 나을지, 아니면 여기서 방어선을 다지는 게 나을지, 홍아영은 정보력을 더 넓혀보겠다고 했고 곽태웅은 필요하면 몸으로 막겠다고 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계속 계산만 했다. 47일 중 며칠이 지났는지, 힘을 한 번 쓸 때마다 대체 얼마나 소모되는지, 그리고 이 소모가 누적되면 남은 시간이 어떻게 줄어드는지. 답이 나오지 않는 계산이었지만, 계산이라도 하고 있어야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날 밤, 나는 홍아영과 곽태웅이 다시 아지트로 돌아간 뒤에도 한참을 계산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붉은 달빛이 부서진 문틈으로 새어 들어와 바닥을 물들이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치 이 오아시스 전체가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것이 단순한 착각인지 아니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어떤 불길한 예고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판단할 수 없었다. 손님도 다 끊긴 객잔 안은 조용했고, 부서진 문짝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이 간간이 정적을 채웠다. 나는 그 정적 속에서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았다. 다섯 명의 사내, 처음 발현한 힘, 북부 상단 연합, 그리고 마왕.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이름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나는 오아시스 초입에서 낯선 기척을 느꼈다. 발걸음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모래가 스스로 움직이는 듯한, 이질적이고도 조용한 접근이었다. 소리도 냄새도 아닌, 그저 피부 위로 스치는 미세한 압력의 변화 같은 것이었는데, 나는 그 감각이 오늘 낮에 겨우 눈뜬 이 새로운 힘 때문에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있었지만 지금까지 무뎌서 몰랐던 감각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것이 오늘 처리한 다섯 명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로, 조금씩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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