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물장수 소년, 목숨을 걸다

3화

우물 아래로 내려가는 밧줄을 몸에 두르면서, 나는 아영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일러두고 혼자 어둠 속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다섯 해 전에는 아무 준비도 없이 떨어졌던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최소한 밧줄이 있으니 그때보다는 나은 상황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사실 별로 안심되지는 않았다. 밧줄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있으면 마음이 놓이는데, 정작 끊어지면 없느니만 못하니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벽을 짚어가며 한참을 내려가자, 익숙한 서늘함과 함께 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고, 곧이어 발밑이 단단한 바닥에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지하 암천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캄캄한 물줄기가 발밑을 넘실거리며 흘렀고, 그 위로 은은한 청록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는데, 다섯 해 전에는 이 정도로 빛이 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새 뭔가 자라난 걸까, 아니면 원래 이랬는데 그때는 내가 반쯤 정신을 놓아서 못 봤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걸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다섯 해 전의 나는 이 물줄기에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땐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그때는 그저 재수 없는 사고라고 여기며 넘어갔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게 사고가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묘하게 헛웃음이 나왔다. [지하 암천의 권능: 무한 침잠] [사용자가 이 물길에 몸을 담글 때, 신체의 한계치가 일시적으로 재설정됩니다. 단, 사용 후 회복 시간이 필요합니다.] 문구를 읽고 나서,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몸의 한계치가 재설정된다니, 이게 정확히 무슨 뜻이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설명서 따위는 어디에도 붙어 있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던져놓고 알아서 해석하라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지겨웠다. 결국 직접 시험해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고, 나는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발끝을 물에 담갔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냉기가 발끝에서부터 치솟았다. 그리고 그 냉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이상하게도 힘이 차오르는 감각이 남았다. 마치 텅 비어 있던 모래주머니에 갑자기 물이 가득 채워지는 듯한, 그런 이질적인 충만함이었다.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고, 나는 놀란 채로 물속에 완전히 몸을 담갔다. [사용자의 근력이 일시적으로 재조정됩니다. 회복까지 남은 시간: 6시간.]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근처 바위 하나를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었는데, 그게 원래는 나 혼자 힘으로는 절대 들 수 없는 크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팔뚝 하나 크기의 돌덩이가 마치 베개처럼 가볍게 들려 올라오는 걸 보면서, 나는 잠깐 내 팔을 내려다봤다. 딱히 근육이 부풀거나 한 것도 아닌데, 힘만 늘어난 이 상태가 영 낯설었다. '...더럽게 쓸모없는 능력은 아니었네' 하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내 6시간이라는 제약이 걸려 있다는 걸 상기하며 웃음을 지웠다. 이 힘을 쓰는 데는 분명한 비용이 있었고, 그 비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로 함부로 쓰다가는 큰코다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를 더 시험해보기로 했다. 먼저 물에 몸을 담그는 시간과 효과의 지속력이 비례하는지가 궁금했는데, 발끝만 담갔을 때보다 전신을 담갔을 때가 확실히 힘의 증폭이 더 컸다. 그렇다면 물에 오래 있을수록 좋은 걸까, 아니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효과가 붙지 않는 걸까. 시험해보려고 다시 몸을 담갔다가 곧바로 나와보니, 아까와 별 차이가 없는 걸 보아 한 번 담그는 것으로 효과는 최대치에 도달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여러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고, 그건 나름 다행이었다. 물이 차가운 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 담그다간 감기부터 걸릴 판이었으니까. [재사용 시, 기존 효과가 초기화되며 회복 시간이 다시 산정됩니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재빨리 다시 담가봤더니, 정말로 회복까지 남은 시간이 6시간에서 다시 6시간으로 리셋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 힘은 중첩되지 않고, 오히려 무리하게 자주 쓰면 회복 시간만 계속 늘어지는 구조라는 뜻이었다. 간단한 계산식이었다. 한 번 쓰면 여섯 시간, 두 번 쓰면 다시 여섯 시간, 결국 필요한 순간을 정확히 골라 딱 한 번만 써야 하는 힘이라는 거였다. 상시로 켜놓고 다닐 수 있는 게 아니라, 승부처에서 한 번 지르는 용도로나 쓸 법한 능력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시험을 몇 번 더 반복하며 규칙을 대략 파악하는 사이, 위쪽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영의 목소리였는데, 평소의 여유로운 어조와는 다르게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소백! 빨리 올라와! 손님이 왔는데, 좀 이상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밧줄을 잡고 서둘러 위로 올라갔다.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가면서 밧줄이 쑤욱 당겨졌는데, 평소라면 팔이 후들거릴 만한 속도로 올라가는 게 지금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이거, 진작 좀 써먹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객잔으로 돌아오자, 낯선 무리 다섯이 문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검은 천, 각자 손에 쥔 곡도, 그리고 그 살벌한 분위기까지, 이건 그냥 지나가는 강도떼가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강도라면 술기운에 취해 시비를 걸거나, 돈이 없어 소란을 피우는 게 보통인데, 이들은 처음부터 목적이 분명해 보였다. 대곰, 그러니까 아영의 부두목인 곽태웅이 이미 그 앞을 막고 서서 술 냄새를 풍기며 으름장을 놓고 있었는데, 상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가 그 우물이 있는 객잔이 맞나" 하고 그중 하나가 낮게 물었고, 나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이들이 상고 보물의 소문을 좇아 여기까지 왔다는 걸 직감했다. 벌써, 이렇게 빨리.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이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다. 겨우 며칠 사이에 이런 무리까지 몰려들 줄 알았다면, 좀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을 텐데. "우물은 있지만, 손님용 물은 유료야" 하고 나는 짐짓 태연하게 받아쳤는데, 그 말에 상대는 코웃음을 치며 곡도를 겨눴다. "주인장의 목숨은 얼마인가." 그가 그렇게 되묻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대곰이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의 눈빛에는 '내가 처리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지만, 지금 이 다섯을 상대할 만한 건 나뿐이라는 걸 그도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이건 내가 처리할게." 그 말을 하는 내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게 들렸는데, 방금 지하 암천에서 시험해본 힘이 아직 몸속에 남아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여섯 시간 중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최소한 아직은 그 여운이 남아 있는 게 확실했다. 상대가 먼저 움직였다. 곡도가 허공을 갈랐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그 궤적을 피했는데, 그 동작이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가벼웠다. 예전 같았으면 상반신을 뒤로 젖히는 것조차 버거워서 반쪽만 피하고 나머지는 얻어맞았을 텐데, 지금은 마치 몸이 저절로 알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파그작!! 내가 맨손으로 놈의 팔을 붙잡아 꺾는 소리가 났고, 상대는 비명을 지르며 곡도를 놓쳤다.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스쳤고, 나는 그 힘의 크기에 스스로도 얼떨떨해졌다. 팔을 꺾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저항감이, 마치 젖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것처럼 어이없이 약했다. 이게 정말 사람의 팔이었나 싶을 정도로. 남은 넷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동료 하나가 순식간에 제압당하는 걸 본 그들의 눈빛에는 당혹감이 스쳤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 명이 곡도를 고쳐 잡으며 자세를 낮췄고, 나머지 셋도 각자의 위치로 흩어지듯 움직였다. 다섯이 한꺼번에 달려들 작정인 모양이었다. '...이 힘, 여섯 시간 동안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건지, 아니면 정도가 있는 건지, 그것도 지금 확인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쨌든 지금 물러설 수는 없었다. 객잔 문 앞에서, 아영과 대곰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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