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놈의 팔이 꺾이는 소리가 나자, 나머지 넷이 동시에 움직였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들의 움직임이 마치 느린 영상처럼 눈에 들어오는 걸 느꼈다. 지하 암천의 권능이 아직 몸에 남아있다는 증거였는데, 그 감각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했다. 마치 오래전에 해봤던 동작을 다시 하는 듯한, 그런 기묘한 기시감이었다. 팔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가벼웠고, 동시에 내 것이 맞는다는 확신이 온몸을 관통했다. 이게 뭔 소리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답이 나올 리 없었다. 그냥 몸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가장 왼쪽에서 달려오던 놈이 단검을 역수로 쥐고 내 옆구리를 노렸는데, 나는 그 궤적이 보이기도 전에 이미 몸을 반쯤 틀고 있었다.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몸이 생각보다 먼저 반응하고, 생각은 그 뒤를 헐레벌떡 쫓아가는 느낌이었다.
퍼억!
두 번째 습격자의 복부에 발을 꽂아넣는 소리가 났고, 나는 그가 뒤로 나가떨어지는 걸 보면서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데 하는 불경한 생각을 잠시 했다. 몸이 반으로 접히듯 꺾이며 뒤로 튕겨 나가는 모습이, 마치 인형극에서 실이 끊긴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생각은 곧 세 번째 습격자의 곡도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목덜미를 스치는 서늘한 감각에, 나는 잠깐 정신이 확 들었다. 아, 맞다, 지금 놀 상황이 아니었지.
"소백!" 아영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나는 이미 그 곡도를 손으로 붙잡아 저지하고 있었다. 맨손으로 칼날을 잡는다는 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손바닥에 닿은 칼날의 냉기가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원래라면 손가락 몇 개는 날아갔어야 정상인데, 살갗이 갈라지는 느낌조차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콰크작!
곡도가 내 손안에서 그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를 들은 나머지 두 명이 순간적으로 멈춰섰다. 부러진 칼날이 바닥에 떨어지며 챙, 하는 맑은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마치 이 싸움의 승패를 알려주는 종소리처럼 들렸다. 그 짧은 정지가 그들의 실수였다. 사람이란 게 예상 밖의 상황을 맞으면 반드시 한 박자 멈추게 되어 있는데, 그 한 박자가 목숨을 갈랐다.
대곰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대한 몸으로 한 명을 그대로 밀어붙였는데, 그 덩치에 부딪힌 습격자가 마치 나무판자처럼 튕겨 날아가는 걸 보고 나는 대곰의 저 몸뚱이가 무기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나머지 한 명의 뒷덜미를 붙잡아 바닥에 짓눌렀다. 놈이 발버둥을 쳤지만,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는커녕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누가 보냈지" 하고 나는 그의 귀에 조용히 물었는데, 그는 대답 대신 이를 악물었다. 그 반응만으로도 뭔가 배후가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한 도적이나 뜬소문을 좇는 방랑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입을 다물 이유가 없었으니까. 도적이라면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 배후를 팔아넘기고 도망치는 게 훨씬 이득인데, 이놈은 그 손익 계산조차 하지 않고 그냥 버티고 있었다. 그건 배후에게 배신했을 때의 대가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 것보다 더 무섭다는 뜻이었다.
"말 안 하면 팔부터 하나씩 접어줄까" 하고 나는 낮게 덧붙였는데, 사실 그럴 능력이 있는지도 몰랐다. 방금까지의 움직임을 보면 못할 것도 없어 보였지만, 위협이 통했는지 놈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결국 입은 열리지 않았다. 뭐, 이런 건 아지트로 끌고 가서 천천히 캐물어도 될 일이었다.
결국 다섯 모두를 제압하고 나서, 나는 숨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은 채 옷매무새를 정리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영과 대곰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뭔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옷깃에 튄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건 방금 전투의 여파라기보다는 이 몸에 흐르는 낯선 힘에 대한 얕은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백, 너 원래 그렇게 셌어?" 아영이 베일 너머로도 눈이 커진 게 보일 정도로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충 넘기려 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놀람과 함께 옅은 경계심도 섞여 있었는데,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걸 목격했을 때 나올 법한 반응이었다.
"우물에서 물 좀 마셨더니 힘이 나네" 하고 얼버무렸지만, 그 대답이 얼마나 허술한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세상에 그런 우물이 어디 있냐고 되물으면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는데, 그건 아마 방금 목격한 광경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뭘 어떻게 물어야 할지조차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극도로 이상한 걸 보면 오히려 침묵하게 되는 법이니까.
"이 자들, 그냥 두면 안 되겠어. 아지트로 끌고 가서 캐물어야겠어" 하고 대곰이 낮게 말하며 쓰러진 습격자들을 밧줄로 묶기 시작했다. 그 큰 손으로 밧줄을 매는 손놀림이 의외로 정교했는데, 이런 일을 해본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게 시작에 불과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상고 보물의 각성 소문이 퍼진 게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무장한 무리가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이 정보를 노리는 세력이 생각보다 훨씬 많고 빠르다는 뜻이었으니까.
간단한 계산이었다. 소문이 하루 만에 퍼졌고, 그 소문을 듣고 무장 인원 다섯을 편성해서 이 먼 객잔까지 보낼 정도의 조직력을 가진 세력이 벌써 존재한다는 것. 그렇다면 오늘 온 다섯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이건 그냥 정찰조거나, 아니면 가장 발이 빠른 놈들이 서둘러 달려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뒤에 더 큰 게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알림: 상고 보물의 계약자가 힘을 발현했습니다. 이 사실이 감지되어 일부 세력에게 전파됩니다.]
하필 이럴 때 뜨는 이 문구가 어찌나 얄궂던지,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방금 습격자들을 처리한 것 때문에, 이제 내 존재가 사막 전역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47일이라는 시한이 걸린 상황에서, 은둔은 이제 사치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힘을 쓸 때마다 소문이 퍼진다니, 이건 마치 숨을 쉴 때마다 종을 울리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살려면 힘을 써야 하는데, 힘을 쓰면 더 위험해진다는 이 아이러니가, 생각할수록 사람 골치를 아프게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최소한으로만 써야겠지.' 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지만, 이미 방금 다섯 명을 상대로 화려하게 실력을 뽐낸 뒤였으니, 이제 와서 조심한다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일단 오늘 밤은 여기서 지키고 있을게.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자" 하고 아영이 습격자들을 데리고 떠나기 전,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배웅했다. 대곰이 습격자 다섯을 어깨에 짊어지듯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 사람이 무거운 걸 참 편하게 짊어진다고, 별 상관도 없는 생각을 잠깐 했다.
객잔 안으로 돌아와 홀로 남게 되자, 나는 부서진 문짝을 대충 세워두고 계산대에 걸터앉아 오늘 일어난 일들을 곱씹었다. 문짝은 경첩 하나가 완전히 뜯겨 나가서, 세워둬도 살짝 건드리면 도로 쓰러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뭐, 문짝 하나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사치스러운 걱정거리였다.
47일, 지하 암천의 권능,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습격자들. 이 세 가지가 한데 뒤엉키면서, 지금까지의 지루하고 평화롭던 일상이 완전히 뒤집혔다는 걸 실감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객잔 뒷마당에서 시든 채소나 뽑아내며 하루를 때우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맨손으로 칼날을 부러뜨리고 무장한 습격자 다섯을 눕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간극이 너무 커서, 오히려 실감이 잘 안 났다.
그리고 그 실감과 동시에, 나는 처음으로 살짝 흥이 오르는 것도 느꼈는데, 그게 스스로도 좀 어이없었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재밌다는 감정을 느낀다는 게, 내가 원래부터 좀 정상은 아니었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흥분한다는 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이 몸에 흐르는 힘도 이미 각성한 뒤였다.
창밖으로 붉은 달이 떠오르는 걸 보며, 나는 문득 마왕이 지금 이 소문을 들었을지 궁금해졌다. 만약 그가 이미 알고 있다면, 그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그는 분명 이 상고 보물이라는 게 어떤 물건인지, 그것이 계약자에게 주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 힘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단순히 소문에 오르내리는 무명의 계약자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가진 누군가의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을 가능성이 컸다.
붉은 달빛이 부서진 문틈으로 새어 들어와 계산대 위를 붉게 물들였는데, 그 색이 마치 오늘 흘렸어야 했던 피처럼 보여서 나는 잠깐 오싹함을 느꼈다. 47일. 남은 날짜를 다시 한번 되뇌어보니, 그 숫자가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오늘 하루 만에 이 정도의 사건이 벌어졌다면, 남은 46일 동안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이 나를 찾아올지, 그건 정말로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