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오전 7시.
출발까지 사흘.
학원 전체가 파견 준비로 분주했다.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평소보다 빨랐다.
어디선가 짐을 옮기는 소리, 장비를 점검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방 안에서 짐을 정리했다.
옷가지를 접었다가 다시 풀었다.
필요한 물건과 필요 없는 물건을 나누는 일인데, 자꾸 손이 멈췄다.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남강 지방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까.
얼마나 추운지, 얼마나 위험한지, 며칠이나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가방 안에 옷을 넣었다.
다시 꺼냈다.
다시 넣었다.
같은 행동을 세 번 반복하고 나서야, 내가 짐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연이 문을 두드렸다.
"오라버니."
"들어와."
서연이 방 안으로 들어와 짐 옆에 앉았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서연의 시선이 가방 안을 훑었다.
접었다 풀었다 한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서연은 그걸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안 돼."
"왜요."
"위험한 곳이야."
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가 위험한 곳에 가는데, 저 혼자 여기서 뭘 해요."
그 말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이건 내 문제야."
"오라버니 문제가 왜 오라버니만의 문제예요."
서연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삼 년이에요. 삼 년을 저한테 다 쏟아부었잖아요. 이제 와서 저 혼자 두고 가겠다는 거예요?"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삼 년.
그 시간 동안 서연이 나았고, 나는 그 아이가 웃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그 대가로 무엇을 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서연 때문에 아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연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울어야 하는 순간인데,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야 하는데 나오지 않았다.
목이 말랐다.
입술이 바짝 말라가는 게 느껴졌다.
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서연아."
"네."
"내가 그동안 숨긴 게 있어."
서연이 나를 봤다.
평소보다 조금 더 긴장한 눈빛이었다.
"내 법역, 원래 이렇게 크지 않았어야 했어."
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20년 전 이야기.
요람에 들어온 빛.
아버지가 취기에 말했던 그날.
대가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
말을 하는 동안 내 목소리가 낮아졌다.
스스로도 몰랐던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어색했다.
20년을 혼자 짐작만 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정리해서 말하고 있었다.
서연은 조용히 들었다.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표정이 조금씩 변했지만, 놀라움보다는 이해하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오라버니는 그 힘이 어디서 온 건지, 뭘 대가로 냈는지 아직도 몰라요?"
"몰라."
"그런데 그 힘을 계속 숨기고 살아온 거예요? 20년을?"
"응."
서연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끝에 서연의 온기가 닿았다.
손끝부터 천천히 온도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무서웠어요?"
"뭐가."
"들킬까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서연이 내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이제는 안 무서워해도 돼요."
그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그냥 서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오전 10시.
장현목 선생님이 나를 다시 불렀다.
마지막 확인이라고 했다.
선생님 방문 앞에 서서 잠깐 숨을 골랐다.
문을 두드리기 전, 심장이 평소보다 빨리 뛰는 걸 느꼈다.
"이현우. 파견을 거절할 수도 있다."
뜻밖의 말이었다.
"학원 측에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대안입니까."
"자네 법역 규모를 축소하는 술식을 시도해볼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나는 놀랐다.
"그런 게 가능합니까."
"확실하지 않다. 위험도 크다. 하지만 시도는 해볼 수 있다."
선생님이 나를 봤다.
"자네가 원한다면, 이번 파견에서 빠지고 그 시술을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
그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힘을 줄인다.
정체를 다시 숨길 수 있다.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
세 가지 문장이 머릿속에서 순서대로 떠올랐다.
힘을 줄인다.
정체를 다시 숨긴다.
평범해진다.
세 번째 문장에서 이상하게 아무 감정도 일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반가웠을 문장인데, 지금은 아니었다.
"위험도가 크다는 건 어느 정도입니까."
"성공 확률은 절반이 안 된다. 실패하면 법역 자체를 잃을 수도 있다."
법역을 잃는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곱씹었다.
서연을 치료했던 힘, 마을을 구했던 힘, 눈을 녹였던 힘.
그 전부가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힘으로 마을 하나를 구했다.
남강 지방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만약 제가 시술을 받으면, 남강 지방은 어떻게 됩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 시간이 더 걸릴 거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
그 시간만큼 사람이 더 죽어간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걸립니까."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반년."
한 달.
반년.
그 시간 동안 남강 지방에서 벌어질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을 하나가 아니라, 열 개, 스무 개가 될 수도 있었다.
선생님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방 안에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오늘 저녁까지 주겠다."
"알겠습니다."
방을 나서면서도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았다.
오후 1시.
나는 훈련장으로 갔다.
며칠 전 눈을 녹였던 그 자리였다.
젖었던 흙은 다시 하얗게 얼어 있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흩어졌다.
손을 뻗었다.
법역을 아주 조금만 열었다.
손끝에서 미세한 열기가 흘러나왔다.
그 열기가 닿은 자리, 얼음이 아주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투명한 물방울이 흙 위로 떨어졌다.
이 힘으로 마을을 구했다.
이 힘을 줄이면, 다시는 그렇게 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힘을 그대로 두면,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대가를 치러야 했다.
손을 거둬들였다.
얼음은 다시 얼기 시작했다.
방금 녹았던 자리에 서리가 얇게 내려앉는 걸 지켜봤다.
이 힘을 줄인다는 건, 저 서리가 다시 얼음이 되는 것처럼 되돌리는 일이었다.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되돌린다고 해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법역이 커진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
그런데 그걸 줄이는 방법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원인을 모르는 채로 결과만 지운다는 게,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방향처럼 느껴졌다.
오후 4시.
서연이 다시 찾아왔다.
"결정했어요?"
"아직."
"제가 결정해도 돼요?"
"뭐?"
서연이 나를 똑바로 봤다.
"저는 오라버니가 힘을 줄이는 거, 반대예요."
"왜."
"오라버니가 그 힘 때문에 지금까지 이만큼 사람을 구했잖아요. 그 마을. 그거 봤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연이 말을 이었다.
"저도 그 힘으로 나았어요. 그거 지우면, 저도 없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런 뜻이 아니야."
"알아요. 그런데 오라버니가 그 힘을 지운다는 게, 저한테는 그렇게 들려요."
그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서연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숨기는 거,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아요?"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오라버니 편이에요. 어떤 결정을 하든."
"...알아."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결정해요."
서연이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오후 6시.
나는 다시 장현목 선생님을 찾아갔다.
"결정했습니다."
"말해보게."
숨을 한 번 골랐다.
심장 박동이 손끝까지 느껴졌다.
"파견을 받겠습니다."
선생님이 나를 바라봤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인지, 다른 걱정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다."
"압니다."
"자네가 최전선에서 법역을 쓰는 순간, 모든 게 드러난다."
"압니다."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은 사흘 뒤다."
방을 나서는 길, 창밖으로 눈이 그친 게 보였다.
오랜만에 맑은 하늘이었다.
구름 사이로 해가 잠깐 비쳤다가 다시 가려졌다.
그 하늘을 보면서,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가벼워졌다.
숨기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뿐인데, 몇 년째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조금 걷힌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낯선 법사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법사회의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바탕에 은색 실로 새겨진 문양, 학원 안에서는 본 적 없는 옷차림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해 꽂혔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낮게 속삭였다.
입 모양은 읽을 수 없었지만, 눈빛만은 분명했다.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걸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의 시선은 한 번도 나를 벗어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나를 찾아온 것처럼, 복도 안의 다른 누구도 보지 않았다.
출발까지 사흘이 남았는데, 벌써 그들이 여기까지 와 있었다.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은데,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