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너진 몸, 깨어난 무신

5화

영상은 정확히 하루 만에 퍼졌다. [정체불명 신입생, 지하 격투장에서 신체능력 130 상대 제압] 제목만 보고도 속이 울렁거렸다. '이러다 진짜 대학에서 잘리는 거 아니야.'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렸다. 댓글창을 열어봤다. [저거 조작 아니냐?] [화질 봐라 CG 티 남] [근데 왜 이렇게 잘 움직여...] '다행이다, 다들 CG로 보는구나.' 이럴 때는 현대인의 의심병이 나를 살렸다. 다행히 얼굴은 흐릿하게 찍혀서 알아보기 힘들었고, 별명도 강호가 즉석에서 지어준 '허수아비'로 퍼졌다. 허수아비라니, 강호 이 자식. '하필 이름이 그거냐, 하다못해 좀 멋있는 걸로 지어주지.' "야, 너 완전 유명해졌어!" 강호가 아침부터 전화해서 소리쳤다. "얼굴 안 나온 게 다행이지, 유명해진 게 아니라." 나는 한숨을 쉬며 답했다. "허수아비, 어감 좋지 않냐? 되게 미스터리하고." "미스터리는 무슨, 그냥 촌스러운 거야." "뭐래, 실시간 검색어 3위 찍었다니까?" '3위라니.' 3위라는 숫자가 주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1등도 아니고 딱 3등, 딱 사람들 눈에 계속 걸리는 애매한 위치. '이럴 거면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천장을 보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틸지 계산했다. '수업 빠지면 더 이상해 보이려나, 그냥 평소처럼 가는 게 낫겠지.' 결국 평소처럼 등교했고,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얼굴이 뭉개진 영상 속 인물과 강의실 뒤편에 조용히 앉아있는 나를 연결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익명의 벽은 생각보다 약했다. 오후에 정미주 선배가 갑자기 학교 게시판 앞에서 나를 붙잡았다. 머리 위로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 "강태현 학생, 잠깐 시간 되죠?" 그녀가 물었다. '큰일 났다.'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시나리오가 스쳐 갔다. 퇴학 통보, 협회 소환, 부모님께 연락, 최악의 경우 감시 대상 등록. '벌써 여기까지 왔나.' "저 어제 그 영상 관련해서인가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먼저 던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숨기려다 더 이상해지는 것보다는 낫겠지, 라는 계산이었다. "영상? 무슨 영상이요." 그녀가 무심하게 되물었다. '……모르는 척이 아니라 진짜 모르는구나.' 순간 온몸의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먼저 정보를 흘린 셈이 됐지만, 그래도 최악은 피했다. 다행히 학교 상급진까지 정보가 안 올라간 모양이었다. '괜히 티 냈나, 아니 그래도 안 걸린 게 다행이지.' 정미주는 재검사 때 89였던 내 신체능력 수치를 다시 언급했다. "입시 성적이랑 재검사 수치 차이가 커서, 신입생 관리부에서 관심 대상으로 올라갔어요." 그녀가 말했다. '하필 관심 대상.' 관심 대상이라는 단어가 참 묘했다.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애매하게 걸쳐 있는, 딱 성적표에서 '노력 요망'이라고 써있을 때의 그 느낌. "몸이 좀 안 좋았습니다." 나는 최대한 그럴듯하게 둘러댔다. "입시 때 컨디션이 최악이라서요, 원래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이래서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임기응변이 는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정미주는 별로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서류를 뒤적였다. "매주 화요일마다 부속 체육관에서 재활 프로그램 있으니까, 참여하세요." 그녀가 서류를 내밀었다. 뜻밖의 흐름이었다. 낙오자로 찍혀 쫓겨나는 게 아니라, 학교 관리 시스템 안으로 편입되는 흐름. '이거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정식으로 재활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매주 신체 훈련 장비를 무료로 쓸 수 있었다. 돈 없는 나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장비 대여료만 생각해도 한 달에 몇십만 원은 절약되는 셈이었다. '이런 게 전화위복이라는 건가.' 영상이 퍼진 덕분에 관심 대상이 됐고, 관심 대상이 된 덕분에 무료 훈련 기회를 얻었다. '인생이 참 아이러니하다.' 서류에 서명하는 손이 조금 떨렸다. 혹시라도 이 서명 하나로 뭔가 더 깊이 얽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미주는 그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고, 서류를 챙겨 자리를 떠났다. 서류에 서명하고 나오자, 한소영 선배가 체육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자세가, 딱 드라마 속 조연 캐릭터 같았다. "너 뭐 서명하고 나오냐?" 그녀가 물었다. "재활 프로그램이요." 나는 서류를 흔들며 답했다. "잘됐네. 나도 거기서 기초 수련받아." 그녀가 씩 웃었다. '이건 정말 예상 못 했는데.'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한소영은 무자 기초 초입 수련자였고, 나보다 훨씬 앞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 곁에서 배울 게 많을 거였다. "근데 진짜 신기하네, 나랑 같은 프로그램일 줄은." 나는 괜히 반가운 척 말을 붙였다. "신기하긴, 원래 신체능력 애매한 애들 다 여기로 몰려."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애매한 애들이라니, 정확한 표현이네.' 정확해서 더 아팠다. "근데 너 어제 그 영상, 혹시 너 아니야?" 그녀가 팔짱을 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 예리한 사람이었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이미 답을 알고 확인하는 사람 같은 눈빛. "아니에요, 저는 그럴 몸도 아니고." 나는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제가 그렇게 움직일 수 있으면 애초에 재활 프로그램 신청할 이유가 없잖아요." 논리적으로 들리게 말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럴듯한데.' "음, 그래." 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 다행히 넘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리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가 걸렸다. "근데 허수아비라는 별명, 뭔가 낯설지가 않네."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못 넘어간 건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날부터 나는 매주 화요일 재활 프로그램에, 남는 시간마다 부속 체육관 훈련장을 드나들었다. 재활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대단한 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알차긴 했다. 기초 체력 측정, 근력 밴드, 진동판, 산소 마스크까지 갖춘 시설이었다. '세금이 이런 데 쓰이는 거였구나.' 새삼 감동했다. 정신력 400을 이용한 왜곡은 오래 쓰면 두통이 남는다는 것도 그 사이 알게 됐다. [정신력 소모 누적 시 부작용 발생 가능.] '역시 공짜는 없구나.' 처음엔 그냥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정도였는데, 며칠 몰아서 쓰니까 눈앞이 핑 도는 정도까지 갔다. '이러다 진짜 어디 쓰러지는 거 아닌가.' 그래서 요즘은 왜곡을 아껴 쓰기로 했다. 정말 필요한 순간에만, 그것도 짧게. 대신 순수하게 몸으로 부딪히는 시간을 늘렸다. 한소영이 옆에서 자세를 봐주면서 은근히 잘한다는 소리도 몇 번 들었다. "너 처음 해보는 거 맞아? 감이 되게 좋은데."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원래 좀 운동 신경이 있는 편이라." 나는 얼른 둘러댔다. '감이 좋은 게 아니라 이미 몸으로 겪어봐서 그런 거지.' 물론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진짜로 몸이 변하는 게 느껴졌다. 신체능력 숫자가 50에서 58, 61로 천천히 올라갔다. 느리지만, 진짜였다. 숫자 하나 오를 때마다 이상하게 뿌듯했다. 마치 옛날에 게임 레벨업 할 때 느꼈던 그 손맛이랄까. '이 맛에 사람들이 헬스를 하는 건가.' 몸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게 체감이 됐다. 계단을 오를 때 숨이 덜 찼고, 아침에 일어날 때 뻐근함도 줄었다. '이대로만 가면 진짜 뭔가 되겠는데.' 작은 희망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강호가 심각한 얼굴로 찾아왔다. 평소 같으면 헐레벌떡 웃으면서 뛰어왔을 텐데, 이번엔 표정부터 달랐다. '뭐지, 이 낯빤대기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태현아, 그 영상 말이야." 그가 말을 꺼냈다. "응, 왜." 나는 무심코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오늘 상급무자 협회 SNS 계정에 그 영상이 올라왔어." 그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상급무자 협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동네 게시판 수준이 아니었다. 화면에는 조회수 수십만이 찍힌 게시물이 떠 있었다. [신입생 허수아비, 협회 관계자들 사이에서 화제.]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숫자가 눈에 박혀서 떠나지 않았다. 수십만이라니, 동네 소문이 아니라 이제는 전국 단위였다. 댓글창을 스크롤했다. [이거 진짜면 협회에서 눈독 들일듯] [신입생인데 130 제압이라니 미친거 아니냐] [학교 어디임? 신상 좀] '신상이라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허수아비라는 별명 아래, 누군가가 이미 내 뒷조사를 시작했다는 예감이 들었다. 강호는 휴대폰을 내밀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래도 얼굴은 안 나오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지?" 그의 목소리에도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라니, 지금 그게 위로가 될 상황이 아닌데.' 나는 대답 대신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댓글 하나가 유독 눈에 걸렸다. [여기 이 각도 나만 이상하냐, 왠지 우리 학교 체육관 구조랑 비슷한데] 댓글에 좋아요가 벌써 몇백 개 붙어 있었다. '……이거 시간문제구나.' 머리 위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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