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너진 몸, 깨어난 무신

1화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강태현. 청림무술대학 신체과학부, 정원 200명 중 187번째. 꼴찌에서 열세 칸 위였지만, 상관없었다. 18년을 갈아 넣은 몸이 드디어 문턱을 넘은 거였으니까. 명단을 스캔해서 다시 확인했다. 혹시 오타는 아닐까, 혹시 동명이인은 아닐까 하고. '강태현... 강태현... 187번.' 세 번을 확인하고서야 실감이 났다. 이게 진짜구나. '전생에는 이런 거 상상도 못 했지.' 전생의 나는 방구석에서 만화책 넘기고 게임 스탯창 들여다보던 오타쿠였다. 근력 스탯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이불 속에서 중얼거리던 놈이었다. 레벨업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스킬트리를 짜는 상상만으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건 다 상상이었다. 만화책 덮으면 그냥 편의점 알바 가야 하는, 그저 평범한 20대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 해청이라는 이 별에서는 그게 진짜였다. 무자(武者)의 세계. 신체능력이라는 숫자 하나로 사람의 가치가 매겨지는 세계. 태어나자마자 측정관에게 신체능력을 찍히고, 그 숫자로 학교가 갈리고, 그 숫자로 인생이 갈리는 세계. 나는 그 세계에서 신체능력 167을 찍고, 진짜로 대학에 합격한 거였다. 18년 동안 매일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뛰었다. 밥보다 근력 운동 순서를 먼저 생각했다. 친구들이 게임하고 놀 시간에 나는 웨이트 룸에서 바벨을 들었다. 그 결과가 167이었다. '전생이었으면 훈련량으로 치트급이었을 텐데.' 이 별에서는 그냥 겨우 턱걸이였다. "태현아! 이 미친놈아!" 박강호가 소리치며 등짝을 후려쳤다. 퍽! "아야, 죽빵 날렸냐?" 나는 어깨를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손바닥이 얼마나 크길래 등짝 한 번에 별이 보였다. "축하한다고 그런 거야, 인마!" 강호가 씩 웃었다. 그 웃음이 또 얄미울 정도로 시원했다. 이 녀석은 신체능력 190. 고등학교 3년 내내 발소랍시고 붙어 다녔지만, 사실 체급이 다른 놈이었다. 집도 잘살고, 몸도 좋고,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애들이 다 좋아했다. 한 번은 체육 시간에 팔씨름 대회를 했는데, 강호가 반 전체를 상대로 전승을 거둔 적도 있었다. 나는 3등으로 탈락했다. 그것도 자랑이라고 애들한테 떠벌렸던 기억이 났다. '나만 빼고 다 이겼구나, 인생 게임에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강호는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몇 안 되는 놈이었으니까. 전생이었으면 이런 놈은 인생 만화 속에서 라이벌 캐릭터로 나왔을 거다. 근데 얜 라이벌이 아니라 그냥... 착한 치트키였다. "근데 진짜 187번이라니." 강호가 명단을 다시 들여다봤다. "간당간당했네, 너." "닥쳐. 그래도 합격은 합격이다." 나는 명단을 손으로 가렸다. "그래, 그래. 인정, 인정!" 강호가 손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나는 마주 손을 부딪혔다. 짝!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주변에 있던 다른 합격자들도 우리를 힐끗 쳐다봤다.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파티한다." 강호가 손가락을 튕겼다. "소영이 누나도 온대. 너도 와." 강호가 덧붙였다. 한소영 선배. 키 180에 어깨가 문짝만 한, 무자 기초 수련 초입에 들어선 사람이었다. 강호랑 무슨 관계인지는 다들 알면서 모른 척했다. 동네에서는 이미 공식 커플로 통했지만, 정작 둘은 아니라고 부인하는 게 콘셉트였다. "소영이 누나 오면 또 나 놀릴 텐데." 나는 미리 앓는 소리를 냈다. "놀리는 거 좋아하잖아, 너." 강호가 눈썹을 씰룩였다.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정색했다. 속으로는 '뭐, 조금 좋아하긴 한다' 라고 인정했다. "간다, 가." 나는 대충 손을 흔들며 답했다. 그날 밤, 파티는 예상보다 컸다. 동네 애들 절반이 몰려와서 술도 아닌 탄산음료로 건배를 했다. 강호네 집 거실에는 이미 종이컵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누군가는 벌써 노래를 틀어놓고 흥얼거렸다. 합격 축하 케이크까지 준비되어 있었는데, 초 대신 숫자 167을 성냥으로 꽂아놨다.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냐."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강호가 자랑스럽게 손을 들었다. "불 끄면 숫자가 안 보이잖아." 나는 태클을 걸었다. "보이라고 불 켜놓고 자르는 거야, 인마." 강호가 당당하게 답했다.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안 되는 것도 같았다. 한소영 선배는 나를 보더니 씩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열세 칸 차이로 붙었다고 들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에 은근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턱걸이죠, 턱걸이." 나는 겸손을 떨었다. "턱걸이라도 걸었으면 된 거야." 그녀가 진지하게 답했다. 그러고는 종이컵을 내 손에 쥐여주며 덧붙였다. "나도 처음 기초 수련 들어갔을 때 딱 그 심정이었어. 문턱 하나 넘었다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지." "지금은요?" 내가 물었다. "지금은 그 문턱이 백만 개는 더 있다는 걸 알지."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파티는 자정 가까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누군가는 게임을 하자고 했다가 강호에게 몸으로 밀려났고, 누군가는 노래방 기계를 켜서 분위기를 흐렸다. 나는 그 사이에서 그냥 웃고, 마시고, 축하받았다. 전생에는 이런 자리에 초대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친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누군가를 위해 축하해주는 자리는 드물었다. '이 별에 와서 얻은 게 이런 거구나.' 몸도 강해지고, 사람도 얻고.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 집에 돌아온 건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밤바람이 차가웠지만 기분은 이상하게 들떠 있었다. 골목을 걸으며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었다. 합격자 명단, 강호의 등짝 스매시, 소영 선배의 말. 전부 좋은 기억들이었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불에서 나는 냄새가 익숙했다. 천장을 보며 나는 오래된 버릇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상태창 오픈.' 전생부터 해온 장난이었다. 게임 속 주인공처럼 손가락 튕기며 혼자 중얼거리는 거. 친구들 앞에서는 절대 안 했다. 혼자 있을 때만, 이불 속이나 방 안에서만 하는 나만의 의식 같은 거였다. 당연히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18년 동안 단 한 번도, 이게 진짜로 될 거라고 믿은 적은 없었다. 이 별에 신체능력이라는 숫자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을 때도, 상태창 같은 게 실제로 뜰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그냥 오락이었다. 전생의 습관이 남아서 하는 무의미한 손짓. 오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합격 기념으로 한 번 더 해보는, 그냥 그런 장난. 그런데. 찌잉-!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였다. '뭐, 뭐야.' 귓속에서 이명이 울렸다. 머리 안쪽에서 뭔가가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전기가 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가 열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뒤로, 처음 보는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무신 시스템 각성 조건 충족.] '……무신 시스템?'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손이 떨렸다. '이거... 진짜야?' 전생 20년, 이번 생 18년, 도합 38년을 살면서 이런 건 처음이었다. 이건 상상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만화나 게임에서 봤던 장면과 똑같은 게,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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