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살아야 한다니, 그게 이유냐."
남천호는 죽장을 마당 한가운데 툭 꽂았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순간, 마당의 흙먼지가 원을 그리며 그를 중심으로 회전했다.
콰르릉—
먼 곳에서 헛간 지붕이 삐걱거리며 흔들렸다. 처마 끝에 매달린 마른 고추 다발이 후드득 떨어졌고, 우물가에 놓인 바가지가 저 혼자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니, 후들거렸다고 말하기도 부족했다. 무릎뼈가 아예 없어진 것 같았다.
'이게... 사람이 낼 수 있는 기(氣)야? 이게 사람이야?'
바람이 아니었다. 저건 그냥 늙은이가 소매 한 번 흔든 거였다. 그런데 세상이 흔들렸다. 나는 순간 내가 여태 알던 무공이라는 것 자체가 장난감 칼싸움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됐느냐."
먼지가 가라앉자 남천호는 다시 평범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방금 지축을 흔든 사람치고는 너무 태연했다. 마치 마당 청소 한 번 한 것처럼.
"어르신, 대체 정체가 뭡니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나도 내가 이렇게 겁먹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름이야 뭐가 중요하겠느냐. 다만 옛날에 파효신검(破曉神劍)이라 불린 적은 있다."
나는 그 이름을 알았다. 관학원 무예과 교과서 뒷장, 각주로 딱 한 줄 실린 이름이었다. 선천 경계 최강자 중 한 명, 백 년 전에 자취를 감췄다고 알려진 전설. 시험에도 잘 안 나와서 애들이 대충 외우고 넘기던 이름이었다. 그게, 방금까지 밥 태웠다고 소리치던 이 영감탱이였다니.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가 다시 채워졌다. 각주 밑에 붙어 있던 삽화까지 떠올랐다. 검을 든 형상으로 그려진 그 노인네가, 지금 내 앞에서 죽장에 기대 서 있는 거였다.
"거, 거짓말이시죠..."
"거짓말이면 방금 그 지붕이 왜 흔들렸겠느냐."
나는 말을 잃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지붕은 지금도 삐딱하게 기울어 있었다. 남천호는 다시 죽장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서 뭔가 무거운 게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여명이 다한 몸이다. 앞으로 한두 달, 길어야 그 정도지. 남은 것들을 정리해야 하는데... 네놈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한두 달. 그 말이 귀에 콱 박혔다. 전설의 고수라는 사람이, 이제 두 달이면 죽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서 있었다.
"저를... 제자로 받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내 목소리가 이번엔 떨렸다. 겁먹어서가 아니라, 딴 이유로.
"제자라는 거창한 말은 붙이지 말자. 그냥 죽기 전에 심심풀이로 하나 가르쳐본다 정도로 여겨라."
나는 그 자리에서 넙죽 무릎을 꿇었다. 흙바닥에 무릎이 닿는 소리가 퍽 하고 났다. 아팠다.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심심풀이든 뭐든, 이 기회를 놓치면 진짜 개새끼다. 이건 인생이 걸린 문제다, 인생.'
"뭐하는 게냐, 절은 나중에 하고 일어나라. 대신 통과의례가 있다."
"통과의례요?"
허리를 펴며 물었다. 목소리에 기대가 잔뜩 실렸다. 뭔가 검을 던져주며 초식을 하나 보여주겠지, 아니면 기를 넣어주는 의식 같은 걸 하겠지,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굴러다녔다.
남천호는 죽장을 들어 마당 저편, 우물가에 쌓인 장작더미를 가리켰다. 그 더미는 사람 키만큼 높았다.
"저걸 오늘 안에 전부 패어 부엌으로 나르고, 아침 끼니 세 번을 태우지 말고 지어내면 통과다."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설의 고수 앞에서 각오를 다졌는데, 첫 관문이 장작 패기라니. 무공은커녕 도끼질이 웬 말인가.
"그, 그게 통과의례입니까?"
"불만이냐?"
노인의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방금 지붕을 흔든 그 기세가 눈동자 안에서 살짝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나는 등줄기가 쭉 서는 걸 느끼며 즉시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나는 곧바로 장작더미로 달려갔다. 도끼는 우물가 옆 나무 그늘에 아무렇게나 박혀 있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나무 결이 손바닥에 그대로 배겼다. 등 뒤에서 남천호가 뒤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 노인이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전설이니 신검이니 하는 것보다, 그 웃음이 훨씬 더 사람 같았다.
그날 나는 장작을 삼백 개쯤 팼다. 팔이 남의 것이 된 것처럼 아팠고, 손바닥엔 물집이 세 개나 잡혔다. 그러나 밥은 단 한 번도 태우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뒤늦게야 알았다. 저 노인이 준 관문이 정말로 도끼질뿐이었는지, 아니면 뭔가 다른 걸 시험하고 있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