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어머니, 제가 이깁니다

3화

"제법이구나." 낮게 깔린 목소리에 나는 봉을 놓칠 뻔했다.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세게 움켜쥔 탓에 봉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뒤돌아보니 남천호가 죽장을 짚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저기까지 걸어온 거지. 발소리 하나 들은 적이 없는데.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야, 이 영감... 소리도 없이 다니고, 그거 반칙 아니야?' 심장이 벌렁거렸다. 등줄기에는 이미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뭘 말씀하시는지..." 일단 잡아떼는 게 상책이다. 나는 봉을 슬쩍 등 뒤로 숨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방금 그 동작, 정 노인의 것도 아니고 관학원 정식 초식도 아니야. 네가 만든 거냐?" 정확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 그건 정 노인의 발놀림과 최 노인의 손목 각도, 그리고 내가 관학원에서 배운 기초 검로를 억지로 이어붙인, 말하자면 짜깁기 무공이었다. 이름 있는 문파의 정통 무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 창안한 것도 아닌, 어디서 주워듣고 몸으로 때려 맞춘 잡탕. 정식 명칭도 없었다. 그냥 '적당히 살아남기용'이라고 속으로 불렀다. 남한테 말하면 웃길까 봐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냥... 훔쳐 배운 겁니다. 이것저것 섞어서요." "섞었다고? 이걸?" 남천호는 죽장으로 바닥을 툭 짚었다. 흙바닥에 작은 구멍이 팍 파였다. 죽장 끝이 저렇게 깊이 박히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새도 없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가 방금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놀랍도록 정확하게 재현했다. 다만 그 속도와 무게가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스릉— 허공을 가르는 소리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공기가 갈라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 노인, 뭔가 이상하다. 그냥 이상한 게 아니라 근본부터 이상하다. '이 영감탱이 뭐야... 밥이나 축내는 늙은이 아니었어? 하루 세 번 밥 축내고 낮잠 자던 그 노인네가 지금 나한테 검로를 보여주고 있다고?' 동작이 끝나자 남천호는 숨 한 번 크게 몰아쉬지도 않았다. 마치 방금 그건 몸을 푼 것에 불과하다는 듯한, 태연한 얼굴이었다.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허접하긴 하다만, 발상은 나쁘지 않구나." 남천호는 다시 죽장에 몸을 기대며 원래의 쭈글쭈글한 노인으로 돌아왔다. 등이 굽고, 눈꼬리가 처지고, 걸음걸이마저 힘겨워 보이는, 어제까지 내가 알던 그 늙은이로. 방금 그 위압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니 오히려 더 소름이 돋았다. 저게 연기라는 건가, 아니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게 저렇게 빠른 건가. "어르신, 방금 그건..." "밥이나 마저 지어라. 배고프다." 대답은 없었다. 그는 이미 등을 돌리고 절뚝절뚝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손에 쥔 봉이 갑자기 나무 막대기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날 밤새 잠을 못 잤다. 이불 속에서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짧은 순간의 움직임이 눈앞에서 계속 재생됐다. 죽장이 허공을 긋는 궤적, 그 소리, 그리고 순간적으로 스쳤던 눈빛까지. 관학원의 검술 교관도, 옛 노병 누구도 그런 몸놀림은 보여준 적이 없었다. 정 노인의 발도, 최 노인의 손목도 좋은 것들이었지만, 남천호의 그것은 격이 달랐다. 마치 다른 종족이 검을 쓰는 것 같았다. '대체 뭐 하던 사람이야, 저 노인네는. 양로원에 들어올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생각할수록 잠은 더 멀어졌다. 결국 새벽닭이 울 때까지 나는 뒤척이기만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양로원으로 나가 남천호가 머무는 별채 앞을 서성였다. 발로 흙바닥에 의미 없는 선을 그렸다 지웠다 하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연습했다. 그가 방문을 열고 나오다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게냐, 이 시간에." 목소리에는 짜증이 반, 귀찮음이 반이었다. 나는 숨을 한 번 삼켰다. "어르신, 어제 그 몸놀림 좀 더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남천호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눈빛이 어제와는 또 달랐다. 마치 뭔가를 가늠하는 듯한, 오래된 계산기 같은 눈빛.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내 팔뚝과 다리와 눈동자까지 훑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그건 왜 보고 싶으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머니 이야기를 할까, 아버지 이야기를 할까, 관학원 이야기를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튀어나온 말은 단순했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말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복잡한 이유 따위, 사실 다 부질없는 거였다. 살고 싶으니까 강해지고 싶은 거였다. 그거면 됐다. 남천호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그 웃음이 내가 지금껏 본 그의 표정 중 가장 사람다웠다. 굽은 등이, 처진 눈꼬리가, 그 순간만큼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따라오너라." 낮게 흘러나온 그 한마디에, 나는 심장이 다시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