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신관이 수정구를 다시 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작동인가."
작은 목소리였지만 신전 안이 워낙 조용해서 다 들렸다.
돌기둥 사이로 스며든 향 냄새가 코끝에 스몄다. 뭔가 성스러운 냄새인 척했지만, 사실은 그냥 향초 타는 냄새였다. 이 와중에 냄새 감상이나 하고 있는 나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측정을 다시 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도. 수정구가 다시 빛났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정확히는 내 몸을 빌려 쓰고 있는,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도현우 도련님에게 쏠렸겠지만. 어쨌든 그 시선을 받아내는 건 지금의 나였다.
신관이 두꺼운 장부를 펼쳐 뭔가를 적더니,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도현우 도련님의 마력 등급은··· 0등급입니다."
장내가 얼어붙었다.
집사가 비명 같은 숨을 삼켰다.
"0, 0등급이라니, 그게 무슨···"
"측정 가능한 최소 마력 수치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신관이 딱딱한 어조로 답했다.
···와, 나 완전 흙수저네. 아니 흙수저도 아니고 무(無)수저구나.
게임으로 치면 스탯 창에 마력이 0으로 찍힌 캐릭터. 밸런스 패치도 안 될 것 같은 수치였다. 우리 회사였으면 이런 캐릭터는 기획 단계에서 반려됐을 거다. "밸런스 붕괴, 재검토 요망" 딱지 붙여서.
집사가 신관에게 매달렸다.
"뭔가 착오가 있을 겁니다, 다시···"
"세 번째 측정을 원하십니까."
신관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
"바쁜 사람입니다, 저도."
그 말투가 어딘가 익숙했다. 퀄리티 검수 미룰 때 팀장님이 하던 말투랑 똑같았다. "바쁩니다, 저도." 죽어서도 이런 데시벨의 짜증을 들어야 하는 건가 싶어 살짝 억울해졌다.
[결과는 세 번을 재도 똑같을 겁니다.]
그 목소리가 또 들렸다. 이번엔 확신에 찬 어조였다.
···너 아까부터 계속 말 거는데, 대체 뭐야.
나는 속으로 물었다.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시스템: 사용자 도현우의 게임 마스터 권한이 이 세계 규칙과 결합되어 활성화되었습니다.】
···뭐?
게임 마스터 권한이라니, 그건 우리 회사에서 개발자만 쓰는 백도어 계정 아닌가. 몬스터 스폰 조절하고 아이템 강제 지급하고 그런 거 하는 그 권한. 근데 그게 왜 여기서, 이런 판타지 신전에서 튀어나오는 건데.
【부마(付魔)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그 순간, 눈앞에 익숙한 창이 떠올랐다.
작업창이었다.
우리 회사 게임의 아이템 강화 시스템과 똑같이 생긴, 아이템 슬롯과 강화 게이지가 있는 창.
···이거 완전 우리 회사 UI인데.
폰트까지 똑같았다. 그 지긋지긋한 산세리프체. 밤새 픽셀 하나씩 조정하던 그 폰트가 여기서 다시 보이니까 반갑기는커녕 소름이 돋았다.
죽어서까지 야근한 결과물을 봐야 하다니. 억울했다.
하지만 억울함은 잠시였다.
집사가 신관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있었다.
"제발, 도련님을 좀 봐주십시오. 이대로면 가문이···"
"규정입니다. 0등급이면 남작위는 왕실로 환수됩니다."
신관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집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가문이 없어진다고?
나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원래 내 인생도 딱히 대단할 게 없었는데, 남의 인생까지 대신 살면서 그것도 몰락까지 해야 하나? 이건 뭐, 망한 회사 인수해서 청산 작업하러 온 꼴이잖아.
억울함이 슬금슬금 화로 바뀌었다.
"잠깐만요."
나는 신관 앞으로 나섰다.
"제가 뭔가 해볼 수 있는 게 없을까요?"
신관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이 딱, 신입사원 면접에서 서류만 보고 이미 답을 정해놓은 면접관의 눈빛이었다.
"0등급에게 뭘 기대하십니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눈앞의 작업창이 반짝였다.
【부마 대상: 없음】
【제작 가능한 아이템: 없음】
···뭐야, 시작부터 할 게 없다는 거야?
이럴 거면 창은 왜 띄운 건지. 로그인은 시켜줬는데 인벤토리가 텅 빈 계정 같았다. 튜토리얼 아이템 하나도 안 주는 게임이 세상에 어디 있냐.
답답한 마음에 신전 바닥에 굴러다니던 조약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냥 손에 힘이라도 주고 싶어서였다. 뭐라도 만지고 있어야 이 상황이 조금은 덜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작업창이 반응했다.
【대상 지정: 조약돌】
【부마 가능 등급: 최하급】
···이거 진짜야?
손끝이 저릿했다. 뭔가 뜨거운 게 손바닥을 통해 조약돌로 흘러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정전기가 계속 흐르는 느낌, 근데 그게 멈추질 않는 느낌.
【부마 진행 중···】
【경고: 사용자의 마력이 극도로 낮아 안정적인 제작이 불가능합니다.】
···아니 그럼 하지 말라고 미리 말을 해줘야지!
우리 회사 QA팀이었으면 이런 경고문 순서 갖고도 지적사항 백 개는 뽑았을 거다. 경고를 진행 시작한 다음에 띄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지만 이미 진행은 시작된 뒤였다.
조약돌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이었다.
"뭐, 뭐야 저건!"
집사가 소리쳤다.
신관도 뒷걸음질을 쳤다. 방금까지 세상 다 안다는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던 그 얼굴이,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색으로 질려 있었다.
빛은 점점 커졌고, 조약돌은 손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진동했다.
【경고: 제작 폭주 위험도 상승 중.】
···폭주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을 안 해주면 어떡해!
머릿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지나갔다. 폭발하는 건가, 손이 날아가는 건가, 아니면 그냥 이 몸도 여기서 두 번째로 죽는 건가. 두 번째 죽음은 좀 억울한데. 첫 번째 죽음도 아직 제대로 이해 못 했는데 벌써 두 번째라니.
삐이익.
귀청을 찢는 소리가 신전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조약돌을 놓으려 했지만, 손이 붙어버린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놓, 놓아지지가 않아요!"
【부마 완성까지 3, 2, 1···】
그 숫자가 세어지는 동안, 나는 온몸의 감각이 조약돌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느꼈다.
뜨거움, 저림, 그리고 마지막엔 아무 감각도 없었다.
콰앙!
신전 천장의 샹들리에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파가 터졌다.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어딘가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자잘하게 들렸다.
···망했다.
연기 속에서 신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 이게··· 대체···"
집사의 기침 소리도 들렸다. 켈록, 켈록, 하는 소리 사이로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이 섞여 나왔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도 연기는 매운 모양이었다.
연기가 걷히자, 내 손안에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물건이 놓여 있었다.
주먹만 한 조약돌이 아니라, 손바닥만 한 크기의 매끈한 청록색 결정체였다.
표면에는 미세한 균열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은근한 빛이 그 안에서 흐르고 있었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은은하게 밝아졌다가 다시 잦아드는 리듬이었다.
신관이 다가와 그 결정체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이건··· 하급 마력석 수준이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정도면··· 중급 이상, 아니 어쩌면···"
그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면서 살짝 불안해졌다. 저런 표정은 우리 회사에서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서버 로그를 보다가 뭔가 잘못 배포된 걸 발견했을 때 팀장님이 지었던 표정.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말하고 싶지 않다.
신전 밖에서 급히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의 발소리였다. 급하게, 규칙 없이 뒤섞여 다가오는 발소리. 누군가 계단을 두 개씩 건너뛰며 뛰어오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영지 조사관님께 즉시 보고해야 합니다."
신관의 그 말에, 나는 뭔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조사관이라니, 그건 또 어떤 인간이 등장하는 이벤트인 거지.
집사의 얼굴을 보니 좋은 소식은 아닌 모양이었다. 방금까지 가문이 몰락한다며 새파랗게 질려 있던 얼굴이, 이제는 또 다른 종류의 새파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산 하나 넘었더니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는 표정.
나는 아직도 손안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청록색 결정체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대체 뭔지, 얼마짜리인지, 그리고 이게 나한테 좋은 건지 나쁜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신전 안의 공기가,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는 것.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