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너진 산하, 남은 족장

5화

그날 밤, 나는 임강수의 천막을 찾았다. 바람이 찼다. 발밑에서 마른 흙이 부서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천막 앞을 지키던 전사가 나를 알아보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느냐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먼저 천막 자락을 걷어 올렸다. 안은 어두웠다. 등불 하나가 흐릿하게 임강수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상반신을 드러낸 채 앉아 있었다. 팔을 감은 붕대 사이로 배어나온 피가 붉게 번져 있었다. 마른 피딱지와 새로 스며 나온 피가 섞여, 색이 진했다. "족장님, 이 밤중에 어찌..." 그가 급히 일어나려 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도로 앉혔다.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로는 안 죽습니다." 그가 애써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빛은 그대로였다. 짙은 자책이 가라앉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살폈다. 붕대를 다시 감아야 할 것 같았다. 손을 뻗자 그가 움찔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가만히 계세요." 낡은 천을 풀고 다시 감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이 어색하게 이어졌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앞으로 나가지만 않았어도..."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붕대를 묶는 손을 멈추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격차를 만든 건 우리가 아니에요." 임강수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그 아래 깔린 무언가 더 짙은 감정. 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내일 성지로 갈 준비를 해주세요. 필요한 건 최소한으로." "알겠습니다." 그가 짧게 대답했다. 눈빛에 남은 자책은 여전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돌아와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원로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회의용 천막 안에는 벌써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박철산과 고덕수는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서로를 향하지 않았다. "흑산 부족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특히 저들의 지휘 체계에 대해서." 고덕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흑산에는 소족장 황웅 외에, 실질적으로 모든 전략을 관장하는 원로가 있습니다. 손소라는 인물입니다." "손소." 낯선 이름이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독수 손소'라 불립니다. 그가 관여한 부족들은 하나같이 서서히 무너져 갔습니다. 정면 승부보다는 내부 균열을 만드는 데 능한 자입니다." 박철산이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황웅은 힘만 앞세우는 애송이지만, 손소는 다릅니다. 지금의 화친 요구도 손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식으로 균열을 만듭니까." "과거 손소가 무너뜨린 부족들의 사례를 보면, 항상 내부 신뢰를 먼저 흔들었습니다. 지도자와 원로들 사이, 혹은 원로들 사이의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요. 소문을 흘리고, 작은 오해를 부풀리고, 결국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다 부족이 스스로 갈라지면, 그때 병력을 들이밉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오백 병력을 끌고 왔음에도 즉각 전면전을 벌이지 않은 것. 사흘의 시간을 준 것. 그 여유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병력 차이가 그토록 명확한데, 왜 곧바로 밀고 들어오지 않았을까. 이건 단순한 여유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균열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전략일 수 있었다. "손소가 노리는 게 뭘까요." "짐작이 갑니다." 고덕수가 낮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잠깐 박철산을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협상파와 항전파로 우리를 갈라놓을 겁니다. 박철산과 저 사이의 입장 차를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박철산의 얼굴이 굳었다. 반박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인정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 자리에서 두 원로가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는 걸 손소가 이미 알고 있다면, 그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희가 할 일은 명확합니다." 나는 원로들을 둘러보았다. "겉으로는 갈라진 것처럼 보이되, 실제로는 하나로 뭉치는 겁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박철산이 물었다. 의심 반, 궁금함 반이 섞인 목소리였다. "협상단을 보내겠습니다. 박철산 원로가 맡아주십시오. 조건 완화를 요청하며 시간을 끄십시오." 박철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에는 여전히 무거움이 남아 있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고덕수 원로께서는 전사들의 훈련을 지휘해주십시오. 손소가 우리를 갈라놓으려 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준비하는 겁니다. 협상과 대비를." "저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임강수가 물었다. 그의 눈빛에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어제의 자책이 아직 가시지 않은 눈빛이었다. "저와 함께 성지로 갈 겁니다." 원로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천막 안 공기가 순간 무거워졌다. "성지에서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고덕수가 물었다. 목소리에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나는 청동 조각을 손에 쥐었다. 차가운 표면이 손바닥에 닿았다. "산하인의 힘을 깨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 순간 천막 안에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박철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족장님. 산하인에 대해 저희에게 숨기시는 게 있습니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하민준이라는 존재, 다른 세계에서 온 기억, 시스템이라는 낯선 현상까지. 설명한다 해도 믿어줄 리 없었다. 오히려 부족을 이끌 자격을 의심받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이것만은 약속드리겠습니다. 부족을 지킬 방법이 그 안에 있다는 것." 박철산의 눈에 의심이 짙어졌다. 그러나 그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고덕수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믿겠습니다, 족장님. 하지만... 언제까지 숨기실 수는 없을 겁니다." 그 말이 가슴 깊이 박혔다. 언제까지, 라는 말이 유난히 오래 귓가에 남았다.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이 침묵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회의가 끝난 뒤, 원로들이 하나둘 천막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나가려던 박철산이 잠깐 멈춰 섰다. "족장님." "네." "저는 족장님을 믿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결정이... 옳았으니까요. 하지만 믿음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나갔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청동 조각을 다시 한번 꽉 쥐었다. 나는 임강수와 함께 성지로 향할 준비를 했다. 짐을 꾸리는 동안, 임강수는 말없이 무기를 챙겼다. 상처 입은 팔로도 익숙하게 움직이는 손길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팔로." "성지까지 가는 데 팔 하나 못 쓴다고 문제될 건 없습니다." 그가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제보다는 조금 편해 보였다. 짐을 거의 다 꾸렸을 무렵, 초소를 지키던 전사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족장님! 국경 초소에서 급보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목소리가 저절로 낮아졌다. "흑산 부족의 정찰대가... 국경을 넘어 들어왔습니다. 협상 기한이 아직 이틀이나 남았는데도요!" 숨이 턱 막혔다. 손소의 계획이 이미 시작된 것인가. 사흘의 시간이라는 말 자체가 함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시간을 주겠다는 말이, 실은 우리를 안심시켜놓고 그 사이에 무언가를 벌이겠다는 뜻이었을지도. 협상단을 보내기도 전에, 훈련을 시작하기도 전에, 저들은 이미 국경을 넘고 있었다. 임강수가 나를 돌아보았다. 짐을 챙기던 손이 멈춰 있었다. "족장님, 어떻게 할까요." 나는 청동 조각을 꽉 쥐었다. 아직 뜨거워지지 않았다. 차가운 표면 그대로였다. 힘을 깨우기도 전에, 저들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전사의 다급한 숨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성지로 가는 길이 이대로 순탄하게 이어질 리 없다는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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