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너진 산하, 남은 족장

2화

사신은 하루가 지나서야 부족 본진에 도착했다.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그 소리만으로도 부족민들이 하나둘 천막 밖으로 나와 목을 뺐다. 검은 갑주를 두른 자였다. 갑주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낯설었다. 흑산 부족의 상징이라는 걸 하진의 기억이 알려주었다. 그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고삐를 당겨 세우고, 나를 내려다보며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표정이 없었다. 사람을 대하는 게 아니라 물건을 배달하는 얼굴이었다. "흑산 부족주의 뜻입니다." 짧은 말을 남기고 그는 바로 몸을 돌렸다.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태도였다. "잠깐." 내가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말발굽 소리가 다시 빠르게 멀어졌다. 순식간에 흙먼지만 남았다. 나는 서신을 받아 든 채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펼쳐보기 전부터 이미 짐작이 갔다. 좋은 소식일 리 없었다. 사신의 태도부터가 이미 답이었다. 협상하러 온 게 아니라 통보하러 온 것이다. 원로들이 모두 모였다. 고덕수, 박철산, 임강수. 박철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부진 체격, 얼굴에 남은 오랜 상흔. 하진의 기억 속에서 그는 전대 족장의 생사형제이자, 나를 어릴 때부터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언제나 걱정과 기대가 반씩 섞여 있었다. "족장님, 어서 열어보시죠." 박철산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서신을 펼쳤다. 얇은 양피지였다. 필체가 날카로웠다. 마치 붓끝으로 사람을 찌르듯 쓴 글씨였다. 짧고 오만한 문장이 이어졌다. 요지는 두 가지였다. 화친을 원한다. 조건은 무산 부족 족장의 딸, 서은채를 흑산 소족장 황웅에게 보낼 것. 그리고 부족의 여인 백 명을 진헌할 것. 숨이 턱 막혔다. 서은채. 하진의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었다. 부족 최고의 재능을 지닌 여전사이자 학자,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벗. 함께 활을 겨누고, 함께 밤을 새워 문자를 익히던 기억이 하진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선명하게 떠올랐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백 명의 여인이라니. 이건 화친이 아니었다. 강탈이었다. "이게... 화친이라고요?" 임강수가 서신을 낚아채듯 다시 읽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요구를 어찌 받아들입니까! 이건 우리 부족을 종처럼 부리겠다는 뜻입니다!" 임강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는 걸 하진의 기억이 알려주었다. 그는 성정이 뜨거운 만큼 부족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그만큼 잘 폭발하는 사람이었다. 박철산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 "강수야, 목소리 낮춰." "어떻게 낮춰요! 저놈들이 우리 여인들을...!" 임강수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자책하는 몸짓이었다. "내가 국경을 지켰어야 했는데. 내가 미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강수야." 박철산이 다시 그를 불렀다. 낮은 목소리였다. 임강수가 허리춤의 단검을 뽑으려 했다. 손목이 칼자루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멈추세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임강수의 눈이 나를 향했다. 놀란 눈이었다. "족장님..." "자책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건 대책입니다." 말은 침착하게 나갔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이 몸에 배어 있는 하진의 습관과 내 안의 이성이 뒤섞여 나오는 말이었다. 어느 쪽이 더 많이 섞였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손을 잡은 순간, 임강수의 손목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겁을 내고 있었다. 화를 낼 수밖에 없을 만큼. 고덕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흑산 부족의 전력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병력만 해도 세 배가 넘습니다. 만약 이 요구를 거절한다면 전면전을 각오해야 합니다." "거절이라뇨." 박철산이 반박했다. "협상의 여지를 남겨야 합니다. 여인 백 명은 줄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소한의 피해로 이 위기를 넘겨야 합니다." "협상이라니, 그게 사람을 팔아넘기는 협상이 아니고 뭐요!" 임강수가 다시 발끈했다. "진정해. 지금 감정으로 될 일이 아니다." 박철산의 목소리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현실적인 판단과 부족의 수치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늙은 짐승처럼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자네 말이 맞아. 이건 사람을 팔아넘기는 짓이지. 하지만 이걸 거절하면, 우리 부족민 전체가 죽어." "그럼 서은채는요? 백 명의 여인들은요? 그들은 사람이 아닙니까?" 박철산이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이 그의 대답을 대신했다. 고덕수가 고개를 저었다. "협상이든 항전이든, 우리 부족의 힘으로는 흑산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임강수가 물었다. 목소리에서 이미 힘이 빠져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천막을 채웠다.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천막 자락이 펄럭거렸다. 누군가의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만큼 조용했다. 나는 서신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손끝에서 다시 그 뜨거운 감각이 스쳤다. 청동 인장을 만졌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열기였다. 이상하다. 허리춤을 더듬었다. 하진의 유품 속에서 낡은 청동 조각이 잡혔다. 산하인(山河印). 하진의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이 떠올랐다. 대대로 족장에게 전해지는 유물이라고. 하지만 그 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위기의 순간마다 뜨거워진다는 전설만이 구전으로 전해질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조각이 서신과 반응하듯 미약하게 열을 내고 있었다. 손바닥 전체로 퍼지는 열감이었다. 마치 무언가가 나를 재촉하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라고, 무엇을 하라고.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족장님, 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박철산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신뢰와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서은채를 넘길 수는 없다. 백 명의 여인도 넘길 수는 없다. 하지만 정면으로 거절하면 전면전이다. 부족민들이 죽는다. 서은채도, 백 명의 여인도,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원로들까지도. 답을 알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나는 하진의 기억과 내 이성을 동시에 뒤졌다. 둘 다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 "시간을 벌겠습니다." 내 말에 원로들의 시선이 모였다. "사신에게 답신을 보내되, 즉답을 피하고 조건을 재고할 시간을 요청하겠습니다. 그 사이 우리는 준비를 합니다." "준비라니, 무슨 준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덕수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손안의 청동 조각을 꽉 쥐었다.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팔목까지 번졌다. "성지에 가보고 싶습니다. 내일." 원로들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성지 말씀입니까? 지금 이 시국에요?" 박철산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흑산의 병력이 언제 국경을 넘을지 모르는 판에, 성지 순례라니요. 족장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고덕수도 거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불신에 가까운 의문이 담겨 있었다. 대답 대신 나는 서신을 접었다. 왜 그 순간 성지가 떠올랐는지는 나도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청동 조각이 뜨거워질 때마다, 그 열기가 어딘가를 향해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감각만이 분명했다. 이 감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하진의 기억이 알려주지 않은 무언가가, 저 성지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었다.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지금은 저를 믿어주십시오." 말이 끝나자 원로들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철산은 뭔가 더 묻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다. 임강수는 여전히 주먹을 꽉 쥔 채였다. 고덕수는 팔짱을 끼고 서신 쪼가리를 노려보았다. 표면적으로는 회의가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천막 안의 공기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나는 청동 조각을 다시 허리춤에 갈무리했다. 손바닥에 남은 열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조각이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서둘러라. 늦기 전에. 무엇이 늦기 전이라는 건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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