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성지는 부족의 본진에서 반나절을 걸어야 닿는 산기슭에 있었다.
동틀 무렵 출발했는데, 그새 해가 정수리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제관은 늙은 몸으로도 걸음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삼십 년을 이 길을 걸었다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족장님, 힘들지 않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진의 몸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낯선 다리였다. 그래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족장이 산길에서 헐떡이는 모습을 보이면 뒤에 남아 있는 원로들 귀에 무슨 소리가 들어갈지 모른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돌기둥들이 보였다. 오래된 돌기둥들이 원을 그리며 서 있고, 중앙에는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었다. 표면에 산과 강을 겹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청동 조각의 문양과 똑같았다.
"여기가 저희 부족의 성지입니다. 대대로 족장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지요."
안내를 맡은 노년의 제관이 말했다. 눈빛에 경외와 조심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바위 앞에 섰다.
청동 조각을 손에 쥔 채였다. 이곳에 오는 내내 조각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따뜻한 정도였는데, 산기슭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였다. 몇 번이나 손을 바꿔 쥐었지만 소용없었다.
"이 문양이... 인장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제관의 눈이 커졌다.
"족장님, 그 조각을...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아버님께 물려받았습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하진의 기억 속에서 이 조각은 대대로 족장에게 전해지는 물건이었으니까. 다만 그 기억의 주인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관이 무릎을 꿇었다.
"산하인이 진짜였군요. 전설로만 전해지던 것을..."
산하인. 아까 원로들 앞에서도 그 이름을 들었다. 그때는 그저 옛이야기 취급하듯 흘려들었는데, 지금 이 늙은 제관의 얼굴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게 정확히 어떤 물건입니까."
제관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전승에 따르면, 부족이 멸절의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힘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멸절의 위기.
지금이 그 순간인가.
흑산 부족의 사자가 다녀간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화친이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본질은 협박이었다. 그리고 지금, 손안의 조각이 타는 듯한 열기를 내고 있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바위가 진동했다.
쿠구구구.
낮은 울림이 발밑에서 올라왔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 제관도 놀란 얼굴로 엎드렸다.
돌기둥들이 하나씩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은은한 청록빛이었다. 하나가 켜지자 그 옆의 것이, 다시 그 옆의 것이 순서대로 물들어갔다.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것이 순서를 지키며 깨어나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제가 이곳을 지킨 삼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제관의 목소리가 떨렸다. 손도 함께 떨리고 있었다. 이 늙은 제관이 두려워하는 게 나 때문인지, 이 현상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청동 조각이 손안에서 더 뜨거워졌다. 이제는 분명한 통증이었다. 살이 익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손을 놓고 싶었지만 놓을 수 없었다. 조각이 손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떼어보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이거 놓으면 안 되는 건가.
바위 표면의 문양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그 빛이 허공으로 뻗어 올라가더니 형체를 만들었다.
산의 형상, 강의 형상. 그리고 그 사이로 흐릿하게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갑주를 입은 인물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실체가 없는데도 압박감이 있었다. 마치 이 산 전체가 그 형상 하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산하인의 잠재가 요동합니다.]
[봉인된 힘의 일부가 흔들립니다.]
귓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아니었다. 인식되는 방식이 문자에 더 가까웠다.
나는 숨을 삼켰다.
이게 뭐지. 시스템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하는 건가.
하진의 기억에도 이런 경험은 없었다.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 몸에 들어온 순간부터 시작된 무언가라는 뜻이었다. 나와 함께 온 것인가, 아니면 원래 있었지만 눌려 있던 것인가.
생각할 틈도 없었다.
빛이 점점 강해지더니, 그림자의 형상이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순간 머릿속으로 파편적인 장면들이 밀려들었다.
불타는 산맥. 무너지는 돌기둥. 절규하는 사람들의 얼굴.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은 갑주를 입은 거대한 형체가 하늘을 뒤덮는 장면.
장면들은 순서 없이 뒤섞여 있었다. 어느 것이 과거인지, 어느 것이 앞으로 올 미래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건 좋은 예감이 아니었다.
"으윽!"
나는 머리를 붙잡고 무릎을 꿇었다.
제관이 다급히 다가왔다.
"족장님! 괜찮으십니까!"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물속에서 듣는 것 같았다.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돌기둥의 청록빛도, 바위의 빛도 잦아들었다. 하나씩 꺼져가는 모습이 방금과는 역순이었다.
청동 조각은 다시 서늘한 온도로 돌아왔다. 손바닥에 남은 얼얼함만이 방금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제관이 팔을 붙잡아주려 했지만 손을 내저어 사양했다.
방금 본 장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건 단순한 부족 간의 분쟁이 아니다.
"제관님, 방금 그 형상을... 보셨습니까."
제관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빛만 보았습니다. 형상은 족장님께만 보였을 겁니다. 산하인이 반응하는 것은 본디 그 소유자에게만 나타나는 법이니까요."
"저 그림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뭔가를 알면서도 말하기를 꺼리는 얼굴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산하인은 원래 하나의 짝을 이루는 물건이라고 합니다. 산과 강, 두 개의 인장. 그중 하나가 이 무산 부족에 전해졌고, 다른 하나는... 오래전 실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실전된 인장이 흑산 부족에 있다는 뜻입니까."
제관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등줄기가 더 서늘해졌다. 만약 흑산 부족이 정말 그 나머지 조각을 쥐고 있다면, 화친이라는 이름의 사자를 보낸 것도 다른 의미로 읽혔다. 그들은 처음부터 서은채나 여인들이 목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산을 내려오는 길, 나는 계속 손안의 청동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표면의 열기는 사라졌지만, 방금 본 불타는 산맥의 장면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그 검은 형체가 하늘을 뒤덮던 장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건 그냥 화친 요구가 아니다.
흑산 부족이 원하는 것이 정말 서은채와 여인들뿐일까.
한 걸음씩 내려올 때마다 그 의문이 무게를 더해갔다. 만약 흑산의 진짜 목적이 이 산하인이라면, 여인들을 넘기든 넘기지 않든 그들은 결국 무산 부족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화친은 처음부터 명분이었을 뿐이다.
산기슭을 벗어나 본진으로 가까워질 무렵,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아니 그 이상이었다.
먼지구름이 지평선을 뒤덮고 있었다.
제관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저건... 흑산의 깃발입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는 뜻인가.
머릿속으로 방금 전 조각이 보여준 장면이 다시 스쳤다. 불타는 산맥, 무너지는 돌기둥, 절규하는 사람들. 설마 그게 앞으로 벌어질 일이었나.
먼지구름 너머로 검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깃발의 문양이 점점 또렷해졌다. 산과 강을 겹친 문양, 그러나 색이 다른 것. 청동 조각과 똑같은 자리에, 정반대의 색으로.
내 손안의 조각이 다시, 미약하게 뜨거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