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왕도 시험탑은 검은 돌로 지어져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입구에 마력등이 은은하게 빛났다.
유겸은 부모와 함께 도착했다.
노경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서아영은 아들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유겸이 짧게 말했다.
말은 태연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입구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서지혁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 뒤에 방계 가문 사람 세 명이 함께였다.
왔군, 노유겸.
서지혁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방계 인원 중 하나가 노경환을 향해 고개 숙였다.
형식적인 인사였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노경환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래, 오랜만이다.
대화는 짧았지만 공기가 무거웠다.
유겸은 그들을 지나쳐 시험탑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넘는 순간, 세상이 흔들렸다.
웅.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유겸은 낯선 회색 공간에 서 있었다.
[각성 시험 시작]
[속성 배정 중...]
뭐야, 여기.
혼자 서 있는 공간이었다.
부모도, 서지혁도, 방계도 보이지 않았다.
법로.
네. 개별 시험 공간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속성 배정 완료]
[속성: 결핍(缺乏)]
뭐?
유겸의 눈이 커졌다.
결핍이 뭔데.
귀걸이가 잠시 침묵했다.
확인 중입니다.
확인이 왜 필요해, 그냥 알려주면 되잖아.
이례적인 속성입니다. 기록된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유겸의 얼굴이 구겨졌다.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일반적으로 저급 속성으로 분류됩니다. 마력 생성량이 극히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하급이라는 거네.
그렇게 보입니다.
유겸은 헛웃음을 흘렸다.
뽑기 한 번에 최하급 등급이라. 이거 완전 쓰레기 확률표에서 뽑았네.
[초기 자질 측정 중...]
또 뭐야.
[측정 결과: 마력 서킷 개방 불가]
[대체 경로 탐색 중...]
개방 불가라고?
유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각성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럼 나 여기서 끝이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대체 경로가 탐색되고 있습니다.
회색 공간이 진동했다.
웅웅.
[대체 경로 발견]
[결핍 속성 특수 조건: 흡수형 개방]
흡수형이 뭐야.
외부 마력을 직접 흡수해 서킷을 여는 방식입니다. 극히 드문 사례입니다.
유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럼 나 지금 이 공간 안에 있는 마력을 빨아들이면 되는 거야?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다만 성공 사례가 기록에 거의 없습니다.
일단 해보지 뭐.
유겸은 눈을 감았다.
손끝을 펼쳤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없었다.
하지만 게임에서 스킬 발동할 때 하던 느낌으로, 뭔가를 끌어당기는 상상을 했다.
순간, 공기가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스으으.
손끝이 뜨거워졌다.
[마력 흡수 감지]
[서킷 개방 시도 중...]
되는 거야?
계속하십시오.
유겸은 정신을 집중했다.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두통이 시작될 겁니다. 정신력 회복 기능을 사용하겠습니다.
[정신력 회복 촉진 발동]
지끈거림이 조금 줄었다.
[서킷 개방 진행률: 43%]
오, 되고 있어.
유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서킷 개방 진행률: 71%]
더 세게.
손끝에서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작은 소용돌이가 손바닥 위에 맺혔다.
[서킷 개방 진행률: 99%]
[개방 실패]
[재시도 가능]
뭐야, 99에서 왜 막혀.
유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부 마력이 역류했습니다. 결핍 속성 특유의 불안정 현상입니다.
다시 하면 되는 거지.
가능합니다. 다만 재시도마다 정신력이 소모됩니다.
유겸은 다시 손을 펼쳤다.
[재시도]
[서킷 개방 진행률: 30%]
이번엔 더 느리네.
정신력 소모로 흡수 속도가 저하되었습니다.
젠장.
손끝의 빛이 흐릿해졌다.
[서킷 개방 진행률: 55%]
[역류 감지]
다시야?
유겸은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이 쪼개질 듯 아팠다.
숙주, 위험 수준입니다. 중단을 권장합니다.
조금만 더.
[서킷 개방 진행률: 82%]
손바닥의 소용돌이가 점점 커졌다.
작은 빛의 알갱이들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서킷 개방 진행률: 96%]
제발.
[서킷 개방 진행률: 100%]
[각성 성공]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번쩍.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퍼졌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뜨거웠다가 곧 차갑게 식었다.
[각성 완료]
[속성: 결핍]
[초기 등급: 최하급]
[특이사항: 재검토 필요]
재검토는 또 뭐야.
유겸이 헐떡이며 물었다.
결핍 속성이 이례적인 방식으로 개방되었습니다. 추가 분석이 필요합니다.
일단 각성은 한 거지.
네. 각성은 확정되었습니다.
유겸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이 가빴다.
최하급이라도, 됐다.
혼잣말이 갈라졌다.
웃음인지 안도인지 구분이 안 됐다.
회색 공간이 다시 흔들렸다.
웅.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유겸은 시험탑 로비에 서 있었다.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결과 발표]
[노유겸: 각성 성공]
[속성: 결핍]
로비 벽면에 결과가 떠올랐다.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결핍이라니, 저게 뭔 속성이야.
누군가 비웃듯 말했다.
방계 인원들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스쳤다.
서지혁이 다가왔다.
표정이 복잡했다.
각성했다고. 근데 그 속성 이름 처음 듣는데.
저도 처음 들어요.
유겸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서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최하급이면 어차피 저급 마법사밖에 못 되잖아. 결혼 얘기는 계속 유효하다.
서지혁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마지막 말이 유겸의 귀에 남았다.
유겸은 벽면의 결과창을 다시 봤다.
[특이사항: 재검토 필요]
이 문구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법로, 재검토가 도대체 뭔데.
귀걸이가 잠시 침묵했다.
결핍 속성이 왜 존재하는지, 그 원리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무슨 기록.
결핍 속성은 다른 속성을 흡수할 때 그 속성의 특성을 일부 계승한다는 고문서 기록이 있습니다.
유겸의 눈이 커졌다.
그러니까, 나는 뭐든 흡수하면 그걸 조금씩 배낀다는 거야?
가능성이 있습니다. 확인된 사례는 아닙니다.
유겸은 손바닥을 봤다.
아까 흡수하며 느꼈던 뜨거운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최하급이라고 무시당했는데, 이게 진짜면.
말을 끝내지 못했다.
로비 저편에서 노경환과 서아영이 달려오고 있었다.
유겸아!
서아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유겸은 고개를 들었다.
부모의 얼굴에 안도와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최하급이라는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겸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결핍이라는 게, 정말 이름만 후진 거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