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열여섯, 각성의 봄

1화

천장 무늬가 낯설었다. 김도훈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낡은 나무 서까래, 삭은 흙벽, 희미한 곰팡이 냄새. 원룸 텐트형 침대가 아니었다. 삐빅. [숙주 인식 완료] [노유겸, 14세, 3급 귀족가 방계 4대손]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귀에 뭔가 걸려 있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니 청동 귀걸이였다. 뭐야 이거.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 어린애 목소리였다. 손도 작았다. 손톱 밑에 흙때가 껴 있었다. 확인해보시겠습니까. 귀걸이에서 흘러나온 음성이었다. 기계 같으면서도 노인 같은 말투. 너 뭐야. 법로라고 합니다. 봉인된 계약 정령입니다. 계약한 적 없는데. 숙주가 저를 착용한 순간 자동 계약이 체결됩니다. 도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넘어오는 빛이 낯설었다. 형광등이 아니라 진짜 태양광 같았다. 상태 확인해도 돼? [이름: 노유겸] [나이: 14] [속성: 미확인] [각성 상태: 미각성] 각성이 뭔데. 이 세계는 마법사의 세계입니다. 16세 전 각성하지 못하면 평민으로 신분이 고정됩니다. 도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나 지금 몇 살이라고. 14세입니다. 2년 남았다는 거네. 정확합니다. 미쳤네. 도훈은 이불을 걷어냈다. 방이 좁았다. 창고 같은 방이었다. 낡은 목재 책상, 다 헤진 옷장 하나. 유겸아, 일어났니. 문밖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고 조용한 톤이었다. 엄마인가. 서아영 님입니다. 숙주의 모친입니다. 문이 열렸다. 덜컹. 서른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물빛이 도는 파란 눈동자였다. 손에는 작은 대야를 들고 있었다. 밤새 열은 안 났고? 여자가 이마를 짚었다. 손이 차가웠다. 물 마법사라서 그런가. 도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괜찮아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색했다. 하지만 여자는 눈치채지 못한 듯 웃었다. 아버지가 아침에 나가시기 전에 너 보고 싶어하셨어. 오늘은 학당 안 가는 날이니까 좀 더 자. 여자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달칵. 도훈은 다시 누웠다. 2년 안에 각성 못하면 평민 락인이라고. 정확히 말하면 신분 고정과 강제 결혼이 함께 발동합니다. 강제 결혼은 또 뭐야. 3급 귀족가는 각성 실패한 자녀의 결혼권을 지역 남작에게 위임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도훈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니까 각성 못하면 어떤 놈이랑 강제로 결혼하고, 평생 평민으로 산다는 거지. 간단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도훈은 천장을 노려봤다. 서까래 틈으로 먼지가 떨어졌다. 각성은 어떻게 하는데. 마력 서킷을 열어야 합니다. 대부분 12세부터 시도하며, 성공률은 속성 친화도에 따라 다릅니다. 난 시도해본 적 있어? 숙주는 3번 시도했고 모두 실패했습니다. 도훈은 잠깐 침묵했다. 원래 몸 주인은 뭐였어. 평범한 소년이었습니다. 재능이 낮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넘어온 거야?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무책임하네. 도훈은 몸을 일으켰다. 작은 손을 펴 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일단 살고 봐야겠다. 혼잣말처럼 던진 말이었다. 귀걸이가 대답 없이 조용해졌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걸음이었다. 쿵, 쿵. 문이 벌컥 열렸다. 유겸아, 일어났냐. 덩치 큰 남자였다. 흙빛 눈동자, 굵은 팔뚝. 손등에 굳은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아버지인가. 노경환 님입니다. 남자가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이 크고 거칠었다. 오늘 건설조합에서 일당 받아왔다. 저녁엔 고기 좀 먹자. 남자의 표정이 밝았다. 하지만 눈 밑이 시커멓게 그늘져 있었다. 피곤함이 얼굴에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도훈은 순간 말을 잃었다. 이 사람이 나를 위해 저렇게 산다고. 속으로 던진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남자는 다시 웃었다. 요새 학당에서 힘든 거 있으면 말해라. 아빠가 다 해결해줄 거야. 네.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또 갈라졌다.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도훈은 다시 누웠다. 법로. 네. 방계 얘기 좀 해봐. 아까 신분 락인이랑 별개로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귀걸이가 잠시 잠잠했다. 숙주의 본가는 3대 50년간 전투직 마법사를 배출하지 못하면 가문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그 기한이 8년 남았습니다. 도훈의 눈이 커졌다. 그럼 나 하나가 그 8년의 마지노선이라는 거네. 방계 친척들 중 일부는 그 자격 박탈을 원하고 있습니다. 박탈되면 본가의 재산과 작위가 분배됩니다. 미친놈들. 도훈은 눈을 감았다. 각성 시한, 강제 결혼, 가문 박탈 음모. 삼중으로 겹친 상황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와, 게임으로 치면 이거 튜토리얼부터 헬 난이도네. 혼잣말이 씁쓸하게 새어 나왔다. 창밖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일단은 자산 목록부터 봐야겠다. [개인 저장 공간 활성화 가능] 뭐야 이건 또. 숙주가 소지한 물건을 별도 공간에 보관할 수 있습니다. 인벤토리네. 용어는 모르겠으나 기능은 비슷합니다. 도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방문 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였다. 서지혁 남작댁에서 사람이 다녀갔대요. 서아영의 목소리였다. 낮고 조심스러운 톤이었다. 뭐래. 노경환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유겸이 각성 여부를 벌써 챙기더라고요. 남작이 직접 신경 쓴다고 했대요. 도훈은 몸을 일으켰다. 문에 귀를 가까이 붙였다. 서지혁이 왜 벌써 우리 애를. 노경환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도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서지혁이라는 이름, 벌써부터 마음에 안 드네. 귀걸이는 조용했다. 방문 너머 대화도 이내 낮아지며 사라졌다. 하지만 도훈은 확신했다. 이 삼중 위기 중 가장 먼저 얼굴을 들이밀 놈이 누구인지. 서지혁. 두 번째로 씹듯 되뇐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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