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백세에 눈이 열렸다

4화

"약점을 짚어낸 게 아니라, 그냥... 보였습니다." 나는 어색하게 손끝으로 이불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방 안에는 아직도 짐승의 피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고,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새벽바람이 그 냄새를 서서히 밀어내고 있었다. 유현담은 그 말을 듣고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눈을 반짝였다. "보였다니, 무엇이 말인가." 그의 눈빛은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찾아낸 사람의 것 같았다. 나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짐승의 몸이... 아주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고, 그중 유독 옅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거기를 치면 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스스로도 이 설명이 얼마나 허황되게 들리는지 알고 있었다. 백 년을 살아왔으되 여전히 연기 이층에 머물러 있는 자가, 무언가 신비로운 눈을 지녔다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나 유현담의 표정은 오히려 진지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런 눈이라...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이야기로군." 그는 무언가를 곱씹듯 낮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이어서 내 손을, 그리고 다시 내 눈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내가 정말로 그런 것을 볼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자네 이름과 사문을 말해보게." "이도현이라 합니다. 운소문(雲霄門) 소속이었으나, 어제 파문... 아니, 심사에서 축기 불가 선고를 받고 산문을 나온 처지입니다." 말을 마치고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백 년의 세월 동안 쌓아온 것이 결국 그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운소문의 이도현이라." 그는 그 이름을 몇 번 되뇌더니, 갑자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조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서글픔이 섞여 있는 듯했다. "백 세가 다 되었는데 연기 이층이라니,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았구먼." 나는 그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귓불까지 뜨거워지는 감각이 낯설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조소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부끄러울 것 없네. 나 역시 자질로만 따지자면 그리 대단한 편이 아니었으니."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목을 들어 보였는데, 그 위에는 낡은 흉터가 길게 새겨져 있었다. 세월에 바래어 옅어진 흉터였으나, 그 깊이만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어 보였다. "이 흉터는 자네가 구해준 그 흑린수에게 물릴 뻔했던 흔적이 아니라, 삼십 년 전 다른 요수에게 당한 것이지. 그때도 나는 죽을 뻔했고, 그때도 나를 구해준 이가 있었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아침 안개가 산자락을 타고 흐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여 있는 듯했다. "그 은혜를 갚지 못한 채 그이는 세상을 떠났고, 나는 늘 그 빚을 어딘가에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살아왔지. 그런데 오늘 자네가 나를 구해주었으니, 이것도 참 얄궂은 인연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나는 그 말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의 진심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떨림이 있었는데, 그것이 슬픔인지 회한인지, 혹은 안도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자네는 축기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 하나, 지금 자네가 지닌 그 눈은 축기 여부와는 상관없는 무언가일세. 그것을 그저 썩혀두기엔 아까운 재주지." 유현담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걸음걸이는 조금 전 요수에게 당한 상처 때문인지 살짝 절뚝거렸으나, 방 한편에 놓인 목갑을 향하는 그 걸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목갑을 열어 낡은 죽간 하나를 꺼내왔다. 죽간의 표면은 오랜 세월에 색이 바래어 누렇게 변해 있었고, 그 위에 새겨진 글자는 이제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흐릿해져 있었다. "이것은 소예(素霓)라 하는 연기심법일세. 축기에는 다소 도움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심법이지만, 나는 이것을 자네에게 전수하고 싶네. 물론 그것만으로 자네가 진 빚을 다 갚는다 여길 생각은 없네. 그저 명목상 사제의 관계를 맺어, 앞으로 내 곁에서 나를 도와주었으면 하네." 나는 그 죽간을 받아 든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죽간의 표면은 서늘했으나, 그것을 쥔 내 손바닥에는 이상하게도 열기가 도는 듯했다. 백 년을 살아오며 처음으로, 누군가가 내게 무언가를 조건 없이 내어주고 있었다. "저 같은 것을... 제자로 거두어주시겠다는 겁니까." 내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떨리고 있었다. 운소문에서 백 년 동안 들어왔던 말들, 재능 없는 자, 그릇이 작은 자, 축기조차 이루지 못한 자라는 그 낙인 같은 말들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명목상이라 했잖은가. 부담 갖지 말게. 다만 자네가 지닌 그 재주, 약재를 살피고 진기의 흐름을 짚어내는 그 눈이 내 연단술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니." 그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고, 나는 그 웃음 안에서 어떤 계산도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웃음에는 순수한 기대와,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받았던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생각해보게. 이곳은 산 깊은 곳이라 찾아오는 이도 드물고, 나 혼자 연단실을 지키기엔 이제 몸이 예전 같지 않네. 자네가 온다면 나는 마음 편히 부적각인술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야." 나는 그 죽간을 품에 안았다. 죽간의 무게는 대수롭지 않았으나, 그것이 상징하는 것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제라도, 무언가가 되어볼 수 있을까.' 그 물음에 스스로 답을 내리기도 전에, 나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사부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는 백 년 동안 짊어지고 있던 무언가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유현담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하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제자." ••• 그날 이후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강선봉의 초옥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소예 심법은 유현담의 말대로 축기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연기 이층에 머물러 있었으나, 그 정순한 진기의 흐름만은 갈수록 매끄러워졌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그 심법의 구결을 되새기며 단전 안의 좁은 그릇을 살피는 일이었는데, 그릇의 크기는 변함이 없었으되 그 안을 흐르는 진기의 결만은 해가 지날수록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그 시야ㅡ내가 후일 스스로 입자안(粒子眼)이라 이름 붙인 그 능력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더 정교해져갔다. 처음에는 짐승의 약점이나 진기의 밀도를 어렴풋이 느끼는 수준이었지만, 십 년이 지날 무렵부터는 약재의 성분이 이루는 미세한 결까지 손끝의 감각처럼 읽어낼 수 있었다. 산에서 캐온 약초를 손에 쥐면, 그 뿌리에 스며든 지기의 흐름이 마치 실처럼 눈앞에 펼쳐졌고, 어느 부분이 약효를 품고 있으며 어느 부분이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지 한눈에 분간할 수 있었다. 이십 년이 지날 무렵부터는 부적에 새겨지는 영기의 흐름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조율할 수 있게 되었다. 유현담이 붓으로 부적을 그릴 때면, 나는 곁에서 그 붓끝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영기가 어떻게 엉키고 풀리는지를 지켜보았고, 아주 미세한 어긋남조차 즉시 짚어낼 수 있었다. "그쪼금 삐끗했습니다, 사부님. 셋째 획에서 영기가 엇나갔습니다." "어허, 이 눈은 정말이지... 스승보다 낫구먼." 유현담은 그런 말로 종종 나를 놀렸으나, 그 얼굴에는 진심 어린 대견함이 담겨 있었다. 유현담은 그런 나를 두고 연단실에 아예 방을 하나 내어주며 부적각인술의 재료 배합을 전부 맡겼는데, 그가 만들어낸 단약들의 성공률은 내가 합류하기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했다. 예전에는 열에 셋이 실패로 돌아갔던 배합이, 이제는 열에 아홉이 성공을 거두었으니, 그 차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자네는 축기를 이루지 못했다 뿐이지, 이미 이 바닥에서는 은둔한 대가 소리를 들어야 마땅한 재주일세." 유현담은 종종 그런 말로 나를 격려했고, 나는 그 말들이 쌓여가는 동안 조금씩 스스로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그런 칭찬조차 비웃음으로 들렸을 터인데, 이제는 그 말을 곱씹으며 조금은 뿌듯함을 느끴기도 했다.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는 동안 강선봉의 초옥에는 여러 손님이 찾아오기도 했다. 인근 마을에서 병든 이가 약을 구하러 올 때도 있었고, 다른 문파의 도사가 유현담의 연단술을 배우고자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용히 뒤편에 물러나 재료를 정리하거나 부적각을 손질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 손님들 중 누구도 내가 원래 축기조차 이루지 못한 자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손에는 부적각(符籒角)을 다루며 생긴 굳은살이 두껍게 박였고, 눈가에는 세밀한 입자를 오래 들여다본 탓에 생긴 잔주름이 깊어졌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선 얼굴이 나를 마주 보았는데, 그것이 세월의 흔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나는 묘한 감상에 잠기곤 했다. 한번은 유현담이 술에 취해 옛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문득 나를 바라보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네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눈빛이 참으로 어두웠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구먼. 그 안에 무언가 자리를 잡은 듯하이." 나는 그 말에 딱히 대답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백 년 동안 쌓아온 좌절과, 그 이후 사십 년 동안 쌓아온 무언가가, 분명 내 안에서 다른 모양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부적각인술의 대가가 되어갔으나, 단전 속 진기의 그릇만은 처음 그대로 좁았다. 아무리 정순한 진기가 흐르고, 아무리 정교한 심법을 익혀도, 그 그릇의 크기 자체는 조금도 넓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축기 불가라는 선고의 진정한 의미였다. '이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그 물음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채, 내 안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밤이 깊어 초옥의 등불이 하나둘 꺼져갈 때면, 나는 종종 그 물음을 되씹으며 홀로 마당에 나와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별빛 아래 서서 단전을 짚어보아도, 그 안의 그릇은 여전히 작았고, 그 좁은 그릇 안에서 진기는 아무리 매끄럽게 흐른다 한들 결국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밤, 유현담이 그 마당에 나와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조용히 곁에 다가와 앉았다. 그의 손에는 낡은 술병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향은 예전에 맡아본 적 없는 낯선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가." "별것 아닙니다. 그저... 이 그릇이 언젠가는 넓어질 수 있을지 궁금해서요." 유현담은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하늘의 별을 향해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생각은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릇이란 것이... 반드시 크기로만 정해지는 것은 아닐세." 그는 그렇게 말하며 술병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확신에 찬 울림이 있었으나, 나는 그 말의 진정한 뜻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언젠가 자네도 알게 될 것이야.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말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초옥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홀로 마당에 남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밤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말속에 숨겨진 어떤 예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이후로도 세월은 변함없이 흘러갔으나, 유현담의 그 말은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언젠가 반드시 그 뜻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예언처럼, 그 말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뒤따르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