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백세에 눈이 열렸다

1화

밤하늘의 결이 이상하다는 것을, 나는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강선봉(降仙峰) 기슭에 자리한 이 낡은 초옥의 창틈으로 스며드는 밤바람에는 평소와 다른 습기가 섞여 있었다.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대기를 이루는 무수한 점들ㅡ내 눈에만 보이는 그 미세한 입자들이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손이 하늘의 결을 슬며시 비틀어놓은 것처럼, 그 흐름은 조금씩 한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다본 밤하늘에는 별들이 유난히 흐릿했다. 구름 한 점 없는데도 별빛이 저리 힘없이 깜박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벌써부터 노인들이 모여 앉아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낮에 다녀온 약초꾼이 전해주었다. 예순 해 만이라고, 그 꽃이 다시 피려 한다고. 나는 창가에 서서 그 말을 곱씹으며 마른 손끝으로 창틀을 매만졌다. 손끝의 굳은살은 이제 세월의 흔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그 감촉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백 년을 살아온 이 몸이 지금 이 순간 어떤 예감으로 떨려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차마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다. '또다시 시작되는 것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 멀리 있었으므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아주 오래된 기억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 내가 죽었던 순간을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강민준. 그것이 전생의 내 이름이었고, 나는 서울 어느 회사의 말단 엔지니어로 살다가 야근이 겹친 어느 새벽 고속도로 위에서 눈을 감았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밤새 도면을 붙잡고 있다가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겨우 퇴근했고,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웠으나 집까지는 삼십 분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으로 핸들을 잡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의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커브길을 앞두고 순간적으로 시야가 흐려졌던 감각, 그리고 브레이크 대신 밟았던 것이 액셀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는 자각뿐. 굉음과 함께 시야가 뒤집히던 그 짧은 순간을 나는 여전히 몸 어딘가에 새겨두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유리 파편이 얼굴을 스치는 감각, 몸이 허공에 붕 뜨는 무게감 없는 느낌, 그리고 모든 것이 캄캄해지기 직전 스쳐 지나간 부모님의 얼굴.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여인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였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야는 온통 흐릿했고 감각은 낱낱이 조각나 있었으나, 정신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명료했다. 이것이 죽음 이후의 어떤 형벌인가, 아니면 그저 꿈인가, 나는 몇 날 며칠을 그 갓난아기의 몸속에서 홀로 되묻고 되물었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의 몸속에 서른 넘은 엔지니어의 정신이 온전히 들어앉아 있다는 것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짐작할 수 없는 종류의 혼란이었다. 손가락 하나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 몸뚱이 안에서, 나는 매일같이 절망하고 매일같이 다시 받아들였다. 나는 강선봉 아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부모는 밭을 갈고 약초를 캐어 겨우 입에 풀칠하는 촌부였으며, 그들에게 나는 그저 늦게 얻은 막내아들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밭일을 하다가도 틈틈이 나를 등에 업고 흥얼거리는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그 가락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다섯 살 무렵부터 나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신동이라 불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생의 기억이 남긴 계산과 논리의 습관 때문이었다. 곡식의 낙수량과 파종 시기를 어림잡아 계산해내고, 우물의 깊이와 물맛만으로 수맥의 방향을 짚어내는 아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저놈은 분명 전생에 뭔가 큰일을 했던 자일 게야." 동네 노인들이 그런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큰일이라고 해봐야 야근에 시달리며 도면이나 그렸던 것뿐인데, 그것이 이 시대의 눈에는 신비로운 재주로 비쳤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여름, 마을에 순회 사자가 들었다. 하늘색 도포를 걸친 사내는 마을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 손목을 짚어보고는 고개를 젓기를 반복했다. 그 표정이 하나같이 심드렁했는데, 내 손목을 짚은 순간에는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이 아이는 자질이 특이하다." 그가 내 맥문을 짚은 손가락에 힘을 더하며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떴다. "기의 흐름이 남들과 다르구나. 마치… 아니, 이건 나중에 확인해봐야 할 문제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으나, 그것이 내 인생을 선문(仙門)으로 이끈 첫 문장이었다.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배웅했고, 나는 어머니의 손을 마지막으로 잡았던 그 온기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나는 열 살의 나이에 부모의 손을 놓고 운소문(雲霄門)의 산문을 넘었다. ••• 선문에서의 삶은 전생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시간의 척도를 요구했다. 연기(練氣)의 첫 층에 이르는 데만도 남들은 몇 달이면 족했다는데, 나는 무려 삼 년을 매달려야 했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단전에 미약한 기운을 감아 도는 그 초보적인 감각조차, 나는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애써야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매일 새벽 인시(寅時)에 일어나 좌관을 시작했고, 다른 이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무공을 익히러 나갈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단전 앞에서 씨름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기운이 잡히는 듯하다가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모래처럼 스르르 빠져나가는 감각을, 나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반복해서 맛보았다. 동기로 입문했던 아이들은 하나둘 연기 삼층, 사층을 지나 마침내 축기(築基)의 관문 앞에 서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연기 이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처지였다. "저 형은 왜 아직도 저기 있어?" 어린 후배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저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도 세월이 흐르니 점점 무뎌졌다.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이는 몇 번이나 바뀌었고, 그들 중 누구도 나를 오래 눈여겨보지 않았다.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뭔가 이상한 게지." 한때 나를 가르쳤던 곡 장로는 그런 말을 남기고 다른 곳으로 부임해갔는데, 그 이상함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못했다. 또 다른 스승은 내 맥문을 짚어보며 한참을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이상하구나. 기운의 통로는 지극히 정상인데, 어째서 쌓이지가 않는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정상인데 안 쌓인다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이상한 대답이 아닌가. 나는 그저 견뎠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배웠던 인내라는 것이, 여기서는 유일하게 쓸 만한 재주였으므로. 밤낮없이 좌관하고, 남들이 자는 시간에 홀로 연공실 구석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는 그렇게 이십 년, 삼십 년, 오십 년을 흘려보냈다. 산문의 벚나무가 몇 번이나 꽃을 피우고 지는 사이 내 검은 머리에는 흰 실이 섞여 들었고, 등은 조금씩 굽어갔으며, 손등에는 세월의 주름이 깊게 파여갔다. 한때 나를 놀리던 후배들은 어느새 나보다 훨씬 높은 배분의 장로가 되어 있었고, 산문을 지나칠 때면 그들이 나를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곤 했다. 배분은 앞서지만 성취는 뒤진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들도 난감했으리라. 하지만 단전 속의 기운은 여전히 연기 이층의 그것에서 한 치도 자라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전생의 사고로 익힌 논리와 관찰력으로 호흡법의 세세한 결까지 남들보다 더 정밀하게 분석해낼 수 있었음에도, 그 어떤 노력도 이 벽 앞에서는 무용했다. 나는 몇 번이고 호흡의 각도를 바꾸어보고, 단전에 기운을 감는 방향을 뒤집어보고, 심지어는 다른 문파의 비전이라 알려진 방법까지 몰래 시험해보았다. 그럴 때마다 잠시 반응이 있는 듯 보였으나, 며칠도 지나지 않아 다시 원래의 정체 상태로 돌아왔다. 마치 아무리 정교한 도면을 그려도 재료 자체가 부실하면 건물이 서지 않는 것처럼, 내 몸이라는 재료 자체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내가 백 세에 가까워진 어느 날 마침내 확인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산문의 노복이 내 처소를 찾아온 것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저녁이었다. 빗소리가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마당의 흙바닥을 파고드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습기 찬 공기 속에 낙엽 썩는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그는 처마 밑에 서서 옷자락에 묻은 비를 털어내며, 나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 대전으로 오라는 전언입니다. 장문인께서 직접 심사하신다고 하니, 준비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장문인께서… 직접이라고?" 내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장문인이 나를 직접 부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노복은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더 캐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그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고,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찻물의 표면에 잔물결이 일었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노복이 마당을 가로질러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백 년을 기다려온 판결이, 마침내 내려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 나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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