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채원이 도착한 날은 하필 비가 왔다.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길래 오늘은 마차가 늦으려나 했는데, 정오가 지나자 빗줄기가 제대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마당의 자갈길이 점점 짙은 색으로 젖어드는 걸 보면서, 나는 괜히 마음이 뒤숭숭했다. 새로 들어올 동생이라니.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이런 날씨에.
시녀들이 우산을 챙겨 들고 현관 앞에 대기했다. 나도 그 옆에 서서 마차가 들어오는 걸 기다렸는데, 정작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벌어진 일은 예상 밖이었다.
채원은 시녀가 우산을 펼치기도 전에 이미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내 앞까지 달려와 두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언니! 저 채원이에요, 기억하시죠?"
옅은 녹색 눈이 반짝거렸다. 밝은 금발은 비에 젖어 이마와 뺨에 아무렇게나 달라붙어 있었는데, 그런데도 웃는 얼굴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환했다. 빗물이 눈썹을 타고 흘러내리는데도 신경조차 안 쓰는 눈치였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이렇게까지 반가워할 일인가.
애초에 얼굴을 마주한 것도 몇 년 전, 아주 어릴 적에 한 번뿐이었다. 그때 기억이 남아 있을 리도 없는데, 저 표정은 정말로 반가워서 짓는 표정 같았다. 연기라면 대단한 재능이고, 진짜라면 더 놀랄 일이었다.
"오랜만이네, 채원아." 나는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채원은 대답을 듣자마자 내 팔짱을 끼고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에 젖은 옷자락이 내 소매에 스치는 게 느껴졌는데도 그 애는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명랑하다는 소문이 소문이 아니었구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 애의 저 순수함이 이 저택 안에서 얼마나 오래갈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문제는 그날 저녁이었다.
한백작가에서 사람이 왔다. 정확히는 한지혁이 직접 왔다. 어머니 쪽에서 미리 언질을 준 것 같았다.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으니 인사차 들르겠다는 전언이 오전에 이미 전해졌고,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차피 세 문장짜리 인사겠지, 뭐.
"오랜만입니다, 서윤 양." "네, 오랜만이에요." 그러고는 서로 눈도 안 마주치고 차만 마시겠지. 나는 그런 그림을 미리 그려놓았다. 몇 번을 겪어봤다고, 이제는 각본까지 짤 수 있는 지경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랐다.
한지혁은 응접실 문턱에서 나를 보더니, 잠깐 멈춰 섰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정지가 낯설어서 나도 모르게 그를 마주 봤다.
"오랜만입니다, 서윤 양."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지난달보다는 문장이 하나 늘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발전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문장 하나에 이렇게까지 감격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이 남자 기준에서는 저게 최선의 예의였을 거라는 걸 알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네, 오랜만이에요."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원망 같은 건 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어차피 이 혼약은 내가 스스로 끊어야 할 실이었다. 붉은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방향을 확인하는 일에는 굳이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아마 내가 서운해하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뭐라도 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가 저렇게 예의를 차리려 애쓰는 모습이 낯설어서, 나는 잠깐 그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차나 한잔하시겠어요? 오늘 채원이가 도착했어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고, 그 순간 한지혁의 시선이 살짝 흔들리는 걸 봤다. 아,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저런 반응이 나오는구나. 나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채원이 응접실로 들어온 건 그다음이었다.
"어머, 손님이 계셨네요!" 채원은 여전히 그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마차에서 내릴 때처럼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아직 마르지 않은 금발 끝이 살짝 곱슬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한지혁은 그 애를 보는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아주 살짝이었지만,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눈이 조금 커졌고,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아, 이거구나.
나는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걸 이해했다. 붉은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던 방향. 그게 바로 여기였구나. 지난 몇 달간 그렇게 뻣뻣하던 사람이, 초면인 상대 앞에서 저렇게 표정을 흘리다니.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한지혁 도련님이시죠? 소문 많이 들었어요!" 채원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방긋 웃었고, 한지혁은 그 웃음에 짧게 답례했다.
"윤 양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두 사람의 대화를 관찰했다. 채원은 신전 이야기, 오는 길에 본 풍경 이야기를 쉼 없이 늘어놓았고, 한지혁은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문장으로 대답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저 사람 입에서 저렇게 긴 대답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있었나 곱씹어봤는데, 없었다.
이상하게도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 사람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봐야, 나는 그 실에서 자유로워지니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면서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이 혼약, 내가 원해서 맺은 것도 아니었고 지금 와서 붙잡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저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면, 그건 오히려 나한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문제는 딱 하나뿐이었다.
채원이었다.
채원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 저 눈빛의 의미를, 저 관심의 방향을. 그 애는 그저 순수하게 반가워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저 애 눈에는 지금 이 자리가 그냥 오랜만에 만난 새로운 인연, 정도로만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순진함이 마음에 걸렸다. 이 저택에서, 이 가문 안에서 저렇게 아무 계산 없이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그날 밤 늦게, 채원이 소식을 들고 내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언니, 언니, 저 신전에서 연락이 왔어요!" 손에 든 봉투를 흔들며 채원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봉투 겉면에는 신전 특유의 금박 문양이 찍혀 있었다. 그 애 손이 떨릴 정도로 흥분한 게 보였다.
"제가 신탁의 표식을 받았대요. 다음 주에 공표식이 열린다는데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신탁의 표식.
그건 그냥 좋은 일이 아니었다. 신전에서 표식을 내린다는 건, 그 사람의 운명이 왕국의 대사와 얽혀버렸다는 뜻이었다. 표식을 받은 자는 두 갈래 길밖에 없었다. 신전에 귀속되어 평생을 예언과 함께 사는 것, 혹은 그 예언이 가리키는 방향에 맞춰 정략의 도구로 쓰이는 것. 둘 다 순순히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그게 어떤 무게를 가진 일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축하해." 나는 겨우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애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 무게를 짊어지게 되겠구나.
채원은 내 표정 따위는 신경도 안 쓴 채 봉투를 품에 안고 방을 빙글빙글 돌았다. 저렇게 좋아할 일이 아닌데. 나는 그 봉투 안에 뭐가 적혀 있을지, 그리고 그 표식이 대체 누구를 향하고 있을지, 벌써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