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신전의 돌바닥은 겨울에도 서늘했다.
발바닥으로 스며드는 그 냉기가 나는 좋았다.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냄새, 저 높은 창으로 들어오는 희끄무레한 빛, 그리고 발끝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서늘함까지. 뜨거운 것들은 늘 나를 배신했으니까. 사람의 온기든, 약속이든, 애정이든.
노신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던 그날을 나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작은 방이었다. 창문 하나 없이, 촛불 두 개만 켜져 있던. 그는 나를 그 방에 데려가더니, 문을 걸어 잠그고, 향로의 연기가 다 흩어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이서윤. 그대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그때 나는 겨우 열다섯이었다. 무릎 위에 손을 얹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은, 조금 안다. 아니, 사실은 많이 안다.
신탁이란 원래 공표되는 것이다. 신전 광장 한복판에서, 사제들이 향을 피우고 종을 울리며, 온 가문이 모인 자리에서 낭독되는 것. 나는 그런 신탁을 몇 번이나 봤다. 이웃 자작가 영식이 받은 신탁, 어느 후작가 영애가 받은 신탁. 다들 화려하게, 요란하게, 자랑스럽게 발표됐다.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내가 받은 신탁은 아무도 몰랐다.
노신관은 나를 따로 불러, 문을 걸어 잠그고, 낮은 목소리로 딱 한 문장을 말해주었을 뿐이다.
"그대는 붉은 실이 얽히기 전에 스스로 그 실을 끊어야 한다."
붉은 실. 혼인의 실. 신전에서는 모든 인연이 태어날 때부터 붉은 실로 이어져 있다고 가르친다. 그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면 혼약이 되고, 완전히 얽히면 혼인이 된다. 그러니까 나는, 이 혼약에서 벗어나야 산다는 뜻이었다.
웃기지 않은가. 나는 이 혼약을 벗어나려 애쓸 필요조차 없었다. 한지혁 쪽에서 먼저 실을 놓아버리고 있었으니까.
한백작가의 장남, 한지혁. 사교계에서는 다정하고 우아하다고 소문난 사람. 나와는 다섯 살 때부터 정혼자였고, 열 살 무렵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나를 보면 웃어주긴 했으니까. 그때는 손을 잡고 정원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누나, 여기 봐. 개미굴이야." 하며 흙바닥에 코를 박고 있던 어린애가, 지금의 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요즘은 아니다.
지난달 다과회에서 그는 내게 딱 세 문장을 건넸다. 하얀 레이스 테이블보 위, 아직 식지 않은 홍차 잔을 사이에 두고.
"오셨습니까."
"차가 식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찻잔에 남은 홍차가 정말로 식어가는 걸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 이 사람 진짜 노력도 안 하네. 적어도 넷째 문장 정도는 준비해 올 수 있지 않았을까. 날씨 얘기라든가, 정원의 장미가 예쁘게 피었다든가. 하지만 그는 그마저도 아꼈다. 마치 나에게 쓸 말을 한 마디라도 아껴서 다른 누군가에게 주려는 사람처럼.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신탁이 나에게 시킨 일을 그가 대신해주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나는 굳이 실을 끊으려 손을 뻗을 필요도 없이, 그가 알아서 실을 놓아버리는 걸 구경만 하면 됐다.
어쩌면 나는 그냥 조용히 지내다가, 이 혼약이 저절로 부서지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됐다. 그게 가장 편한 길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손가락질받지 않는.
문제는 어머니였다.
"서윤아, 이번 주말에 청하 자작댁에서 채원이가 온다더구나."
어머니, 박수련은 내 앞에서 차를 따르며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 찻주전자를 기울이는 손끝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네 이모님 딸 말이다. 기억하지? 어릴 때 몇 번 봤을 텐데."
채원. 윤채원.
기억이 났다. 밝은 금발에 옅은 녹색 눈을 가진, 나보다 두 해 어린 아이.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명랑했다는 것만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정원에서 나비를 쫓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다 까졌는데도 울지 않고 웃던 애였다. "괜찮아! 나비가 더 놀랐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나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수도에서 좀 지내다 갈 거란다. 사교철도 다가오고, 너랑 같이 다니면 좋지 않겠니."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고, 나는 형식적으로 웃어 보였다. 속으로는 다른 걸 계산하고 있었다. 사교철에 어울리는 상대, 어머니가 원하는 그림. 이모님 딸이라고는 하지만, 어머니가 나에게 사람을 붙이는 데는 늘 이유가 있었다.
"좋아요, 어머니. 오랜만에 보면 반갑겠네요."
네, 좋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그 말속에 아무 의미도 담지 않았다. 어머니가 원하는 대답을 던져주는 게 가장 빨리 이 대화를 끝내는 방법이었으니까.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날 밤, 방에 돌아와 창문 밖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신전 첨탑이 어렴풋이 보이는 창가였다. 유리창은 차가웠고, 이마를 대자 그 냉기가 다시 좋았다.
붉은 실이 얽히기 전에 끊어야 한다.
그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상한 게 하나 있었다. 한지혁이 나를 멀리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그 실이 완전히 풀린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뭔가 다른 방향으로,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세 문장짜리 다과회.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그의 눈은 나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나를 보는 걸 스스로 금지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게 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 실을 붙잡고, 방향을 바꾸려 하는 것처럼.
나는 그게 뭔지 아직 몰랐다. 노신관에게 다시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 한 문장을 마지막으로, 신전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가버린 뒤였으니까.
다만 확실한 건, 채원이 도착하는 순간부터 뭔가가 달라질 거라는 예감뿐이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늘 그렇듯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