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으나, 절벽 위에서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눈발이 제법 굵어졌을 즈음에야 강휘는 조심스레 눈을 떴는데, 회색빛 하늘과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눈송이가 소용돌이치듯 떨어지는 풍경이 마치 자신이 잃어버린 화선산의 겨울을 떠올리게 해 잠시 가슴이 저릿했다.
화선산의 겨울은 늘 이렇듯 조용했다. 천진대성으로서 무수한 요괴와 신선들 사이를 오가며 살았던 그 세월 동안에도, 눈이 내리는 밤이면 산문 앞에 홀로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버릇이 있었는데, 지금 이 낯선 절벽 아래에서도 그 버릇이 몸에 남아 있었던 것인지, 강휘는 눈송이 하나가 자신의 뺨에 닿아 녹아내리는 감각을 오래도록 느끼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으윽!
짧은 신음이 절로 터져나왔는데, 그 통증이 낯설면서도 반가운 것은, 천진대성으로서 성인계의 경계까지 넘보았던 그였다면 이런 정도의 상처는 숨 한 번 고르는 사이 아물었을 것이었으나, 지금 이 몸은 겨우 육신 칠단 경지에 불과해 뼈 하나 붙이는 데도 뼈저린 인내가 필요했다. 손끝을 움직여보니 왼쪽 손목이 퉁퉁 부어 있었고, 옆구리를 짚자 부러진 갈비뼈가 살갗 아래에서 어긋난 채로 걸리는 느낌이 전해졌는데, 그 미묘한 통증의 결이 오히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져 강휘는 쓴웃음을 지었다.
강휘는 어금니를 물고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이 몸의 원래 주인과 자신의 기억이 뒤섞여 흘러드는 것을 느꼈는데, 조필이라는 사형이 오래전부터 이 잡역 제자를 괄시하고 부려먹었으며 끝내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는 사실이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 일부터 사형들의 세탁까지 도맡아 하던 십 년의 세월, 그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따뜻한 눈길 한 번 받지 못했던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조필의 냉소 어린 얼굴이었으리라. 그 기억이 강휘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심장 어딘가가 아릿하게 조여왔다.
무량대사의 금줄, 현공진인의 침묵, 그리고 이 몸의 조필까지—강휘는 낮게 실소를 흘렸다.
"어디를 가나 배신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구나."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단전 안쪽에서 홍몽진기가 저절로 요동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눈발 속으로 희미한 아지랑이처럼 새어나가 주위의 대기를 흔들었으며, 그 파장이 삼십 리 밖에서도 감지될 만큼 은은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 강휘는 그 기운을 억누르려 했으나, 마치 오랫동안 갇혀 있던 짐승이 좁은 우리를 벗어나려 발버둥치듯, 진기는 그의 단전 벽을 두드리며 스스로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장을 감지한 것은 강휘만이 아니었다.
절벽 아래 계곡을 따라 내려오던 흑풍채의 도적 무리 중 한 사내가, 코를 킁킁거리며 걸음을 멈춰 세운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흑풍채는 이 지역 일대에서 오래전부터 상단의 짐과 여행객의 노잣돈을 노려온 산채로, 관의 토벌조차 몇 차례 물리친 바 있어 근방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 이름만 들어도 걸음을 서두르게 만드는 존재였다.
"이상한데. 이 근방에 뭔가 있어."
곽삼이라는 이름의 그 사내는 눈매가 좁고 광대가 튀어나온 얼굴로, 손등에 굳은 흉터가 여러 개 나 있어 오랫동안 칼질을 해온 자임을 짐작케 했는데, 그가 킁킁거리며 다가온 방향이 바로 강휘가 쓰러져 있는 바위틈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다른 두 사내가 무슨 일이냐 묻는 눈짓을 보냈으나, 곽삼은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춰 세우고는 홀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 걸음걸이가 마치 사냥감의 냄새를 좇는 늙은 승냥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강휘는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즉시 몸을 낮추었으나, 부러진 갈비뼈가 다시 비명을 질러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고, 이대로는 숨을 곳도 도망칠 힘도 없다는 사실이 냉정하게 다가왔다. 바위틈은 겨우 몸 하나를 접어 넣을 정도로 좁았고, 그마저도 쌓인 눈이 반쯤 메워버려 은신처라 부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강휘는 숨을 죄어가며 눈알만 굴려 주변을 살폈으나, 마땅히 몸을 숨길 만한 나무 그늘이나 바위 그림자조차 눈에 뜨이지 않았다.
"거기 누구 있나?"
곽삼의 목소리가 바위틈 바로 위에서 울렸다.
강휘는 눈을 감은 채 숨을 완전히 멈추었는데, 그 정지의 시간 속에서 단전의 홍몽진기가 마치 스스로 살아 있는 것처럼 다시 한 번 꿈틀거렸고, 그 진동이 손끝까지 저리게 만드는 것을 느끼며 강휘는 이를 악물었다. 곽삼의 발소리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고, 그가 허리춤에 매어 둔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는 소리가 눈 위에서도 유난히 크게 울렸다.
곽삼의 그림자가 바위틈 입구를 가리는 순간, 강휘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그의 발목 쪽으로 뻗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