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천선계 대라천, 백옥으로 깎아 세운 대웅전 처마 밑에서 강휘는 무릎을 꿇은 채 목에 감긴 금줄이 살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준성인의 반열에 오른 무량대사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 속에 어떤 자비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깨달았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도 없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 소리마저 마치 조종을 알리는 것처럼 귓전을 때렸으며, 대웅전 기둥에 새겨진 용의 형상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강휘는 그 순간 자신이 지나온 수백 년의 수행이 결국 이런 결말을 위한 것이었는가 하는 헛헛함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순간, 스승이라 믿었던 현공진인이 등 뒤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죽음보다 더 차가운 통증으로 가슴 한복판을 찔러왔다. 수십 년을 사부라 부르며 그 가르침 하나하나를 목숨보다 귀히 여겼건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등을 돌린 채 침묵으로 답하고 있었으니, 강휘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목에 감긴 금줄이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쿵!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뒤집혔고, 강휘는 눈을 떴다.
그러나 그를 감싸고 있던 것은 백옥 처마도 금줄도 아니었으며, 차갑게 젖은 바위 틈에 등을 기댄 채 갈비뼈 몇 개가 부러진 낯선 몸뚱이였고, 코와 입으로 스며드는 흙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정신을 아득하게 흔들었으니, 그는 자신이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에 걸려 있다는 것을 온몸의 통증으로 먼저 알아차렸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조차 뼈마디를 갈아내는 것처럼 아팠고, 등허리 아래로는 감각조차 희미해져 있어서 이 몸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여기까지 굴러떨어졌는지를 짐작케 했다.
절벽 위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확실히 밀었어. 저 아래로 굴렀으니 뼈도 못 추릴 거다."
낮고 거친 사내의 음성이었는데, 그 말투에 조금의 죄책감도 묻어 있지 않은 것이, 마치 벌레 한 마리를 밟아 죽인 것처럼 태연했다. 목소리가 울리는 방향으로 미루어 절벽 위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듯했으며, 발밑에서 부서지는 자갈 소리가 간간이 섞여 드는 것으로 보아 아직 그 자리를 뜨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 사형,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다른 목소리가 조심스레 끼어들었으나, 조필이라 불린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그럴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저 높이에서 굴러떨어져서 살아남을 놈이 있으면 내가 여기서 목을 내놓지. 괜한 데 시간 쓰지 말고 내려가자."
그 말에 밑에 있던 자가 마지못해 대답하는 소리가 이어졌고, 강휘는 그 순간 자신의 육신이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가던 바로 그 순간과 겹쳐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누군가의 손에 밀려 이곳까지 떨어진 몸, 그리고 그 몸이 채 숨이 끊어지기 전에 자신의 넋이 흘러들어 온 것이니, 어쩌면 이것이 하늘이 내려준 두 번째 삶인지도 몰랐다.
숨을 쉬는 것조차 위태로웠다.
강휘는 눈꺼풀을 미세하게 떨면서도 감히 뜨지 않았고,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최대한 억누른 채 죽은 사람처럼 늘어져 있었는데, 그 짧은 정지 속에서 몸 깊은 곳 어딘가에서 낯설고도 익숙한 기운이 실낱처럼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짐승이 서서히 눈을 뜨는 것처럼, 그 기운은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조금씩 몸 전체로 퍼져나가며 부러진 갈비뼈의 통증마저 아스라하게 무디게 만들었다.
홍몽진기였다.
천선계 성인계의 문턱까지 그를 밀어 올려주었던 그 태초의 기운이, 지금은 손끝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 초라한 몸뚱이 안에 온전히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절망 속에서도 실낱같은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수백 년의 수행으로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던 그 기운이 어찌하여 이 낯선 몸속에 이토록 순순히 자리를 잡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이 몸이, 이 목숨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
절벽 위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조필과 그 일당이 완전히 자리를 뜬 것인지, 바위틈으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만이 남았고, 늦가을 하늘에서 첫눈발이 하나둘 흩날리기 시작했는데, 그 눈송이가 강휘의 뺨 위에 내려앉는 순간에도 그는 감히 눈을 뜨지 못하고 그저 숨을 죽였다. 눈발은 처음엔 드문드문 흩어지다가 이내 조금씩 굵어졌으며, 바위틈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가 부러진 갈비뼈 사이사이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으나, 그럴수록 오히려 정신은 또렷해졌다.
인간이 절망한 곳에는 신조차 발 딛지 않는다 하였으나, 강휘는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 오히려 낯선 온기가 뱃속 깊은 곳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 몸이 결코 그대로 죽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에 조용히 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 순간, 절벽 위 어딘가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멀어지던 조필의 걸음이 아니라, 오히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낯선 누군가의 발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