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당해 죄인 도시 접수합니다

5화

도현의 그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짐을 빼앗으려던 소년단의 리더가, 불과 몇 분 전까지 단도를 들이대던 상대에게, 스스로 무릎을 꿇고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히는 상황이라니. 서윤은 잠시 그 말을 곱씹으며 도현의 얼굴을 살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눈빛에 담긴 것은 굴복이라기보다는 계산이었다. 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한 자에게 붙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걸, 도현은 오랜 세월 몸으로 익혀온 듯 보였다. 손톱 밑에 낀 흙, 옷깃에 배어 있는 그을음 냄새, 그리고 눈동자 깊은 곳에 자리한 계산적인 빛까지도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몇 살이나 됐을까.' 열다섯, 혹은 열여섯쯤 되었을까 싶은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이미 노회한 상인의 것에 가까웠다. "조건이 있어." 서윤이 말했다.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분하게 나왔는데, 왕도에서 온갖 시선을 견뎌내며 배운 것이 있다면 적어도 목소리를 떨지 않는 법 정도는 되는 모양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윤은 이 도시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 어느 구역이 누구의 세력권인지, 물자는 어디서 조달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 도시를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는 큰 세력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였다. 도현은 그 요구에 순순히 응했고, 그날 밤이 다 가기 전에 서윤은 흑월성의 대략적인 지도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성 서쪽은 오래된 무기 밀매 조직이, 남쪽은 도박장을 운영하는 무리가, 그리고 동쪽 창고 지대는 도현의 소년단이 겨우 발붙이고 있는 구역이라는 것. 도현은 손가락으로 흙바닥에 대략적인 선을 그으며 설명을 이어갔는데, 그 손끝이 어찌나 익숙하게 움직이는지, 마치 이 도시의 지형을 처음부터 몸에 새기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내가 있을 곳은." 서윤이 묻자, 도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들이 쓰는 창고 한 켠을 내주겠다고 했다. 넓지도 깨끗하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밤바람을 피할 지붕은 있었다. '지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나.' 서윤은 속으로 자조하듯 웃었다. 왕도의 후작가 저택에서는 지붕이 있다는 사실 따위를 감사할 일로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창고 안으로 들어서자 곰팡이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습기 먹은 목재 냄새 아래로 흐릿하게 섞여 있는 것은 오래 묵은 밀가루 자루의 냄새였는데, 그 구석에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낡은 담요를 덮고 누워 있었다. 도현이 다가가자 아이가 부스스 눈을 뜨더니 오빠라고 부르며 팔을 뻗었다. "은지야." 도현의 목소리가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처럼 부드러워졌다. 방금까지 서윤을 상대로 냉정한 계산을 하던 그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어린아이를 다루는 손길이었다. 아이의 이마를 짚는 손가락에는 조금 전 서윤에게 단도를 겨눴던 그 손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은지라는 아이는 낯선 서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도현의 옷깃을 붙잡고 그 뒤로 숨었다. 서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왜인지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흑월성이라는 무법지대에서, 이렇게 작은 아이가 오빠 하나만 믿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던 것이다. 담요는 여기저기 해져 있었고, 아이의 발목은 앙상했으며, 그 위로 보이는 상처 자국 하나가 유독 눈에 밟혔다. '누가 이런 곳에 아이를 두고 싶겠어.' 그런데도 이 도시는 그런 선택지조차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 형이 왜 오빠 옆에 있어?" 은지가 조그맣게 물었다. 목소리가 채 여물지 않아 어딘가 새처럼 가늘게 떨렸다. 도현은 잠시 대답을 고르는 듯 침묵하다가, 결국 짧게 대답했다. "우리를 지켜줄 사람이야." 그 말에 서윤은 순간 놀랐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자신을 위협하던 상대가 벌써 그런 식으로 관계를 정의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낯설면서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지켜줄 사람이라니, 언제 그런 계약을 했더라.' 하지만 굳이 정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은지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서윤을 살피다가, 결국 도현의 옷깃을 놓지 않은 채로 다시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밤이 깊어지고 은지가 다시 잠에 빠져든 뒤, 창고 안에는 오직 낡은 등불 하나가 흔들리며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도현은 서윤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왜 추방됐소." 서윤은 그 물음에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후작가에서 완전히 버려졌다는 사실, 이태호 후작이 딸을 화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득 목덜미를 서늘하게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왕가의 눈치를 보느라 딸을 구제할 수도 없었던 아버지의 굳은 얼굴이 떠올랐고, 그 순간 이서윤이라는 인물이 이 세계에서 얼마나 철저히 혼자인지가 새삼 실감되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하늘은 별 하나 없이 캄캄했다. 왕도의 밤하늘과는 전혀 다른, 매연과 습기로 뒤덮인 흑월성의 밤이었는데, 그 무심한 어둠을 바라보고 있자니 서윤은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이 얼마나 먼 곳인지가 새삼 실감되었다. '가족이 없다는 건, 결국 이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서윤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 다독임 아래 깔린 서운함까지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악마와 계약했다는 누명을 썼어." 서윤이 짧게 대답했다. 도현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 듯했지만, 굳이 더 묻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서윤의 얼굴을 살피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가늠하려는 듯한 시선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이 도시에선." 도현이 말했다. "누명이든 진짜 죄든 상관 안 하오.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거니까." 서윤은 그 말에 짧게 웃었다. 그 무심한 룰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왕도에서는 혈통과 명분이 전부였지만, 이곳에서는 오직 힘과 실질적인 능력만이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었다.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적어도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딸이 아니라, 그저 이서윤이라는 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서윤이 물었다. "왜 은지랑 여기 있는 거야?" 도현은 그 물음에 잠시 답을 미루었다. 등불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로 짧게 흔들렸고, 그 사이 서윤은 그가 답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살아야 하니까." 짧은 대답이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지만, 그 세 글자 안에 담긴 무게가 어쩐지 서윤의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 창고 밖에서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발소리가 여러 개 겹쳐 다가오고 있었고, 그 사이로 낮게 주고받는 목소리 몇 마디가 섞여 들었다. 도현이 순간 표정을 굳히며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향했고, 서윤 역시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심장이 이유 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경계심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창고 문틈으로 내려다보니, 남쪽 도박장 세력의 표식을 단 사내 몇이 창고 구역 초입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등불과 함께, 낯익은 형태의 서찰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도현의 얼굴이 그것을 보는 순간 눈에 띄게 굳어졌다. "저건." 도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성녀 쪽 사람들이오." 서윤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흑월성 안까지 유하은의 손이 뻗어 있다는 것이, 이 도시에 도착한 첫날 밤부터 확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등불 빛에 어른거리는 서찰의 문양이 어딘가 익숙했다. 왕도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성녀의 인장이었다. '벌써.' 서윤의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도망쳐 온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무법의 도시에마저 유하은의 그림자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이, 서윤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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