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당해 죄인 도시 접수합니다

4화

도현의 뒷모습이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서윤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짐 보따리 끈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닿는 낡은 삼끈의 질감이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느껴졌는데,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듯했다. 곧 알게 될 거라던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아 있었다. 위협이라면, 이 도시에 도착한 첫날부터 표적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환영 인사가 참 살벌하네.' 서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골목 어귀를 다시 한번 살폈다. 낮게 깔린 안개 사이로 부서진 담벼락과 무너진 지붕들이 희미하게 드러났는데, 이 도시가 원작 소설 속 배경으로만 읽었던 그 흑월성이라는 사실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졌다. 밤이 되자 흑월성의 골목은 낮보다 훨씬 어두웠다. 벽 틈새로 스며드는 냉기가 옷 사이를 파고들어와 서윤은 짐 보따리를 끌어안은 채 폐가 처마 밑에 몸을 웅크렸다. 등 뒤로 닿는 벽의 냉기가 옷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고, 발끝은 이미 감각이 무뎌진 지 오래였다. 이런 데서 밤을 보내야 한다니, 원작의 이서윤도 이렇게 시작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지금 중요한 건 살아남는 쪽이라는 걸 서윤은 새삼 되새겼다. 잠들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는데, 골목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여럿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발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숫자가 많았고, 돌바닥을 딛는 소리마다 미묘하게 다른 리듬이 섞여 있어 여러 명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눈을 뜨자 도현을 포함한 소년단 아이들 다섯이 처마 밑을 둘러싸고 있었다. 낮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였는데, 어둠 속에서도 도현의 눈빛만은 유독 또렷하게 빛나 보였다. 그의 손에는 짧은 단도가 들려 있었고, 낮의 대치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진짜로 짐을 빼앗을 생각인 듯 칼끝이 미세하게 그녀를 향해 기울어 있었다. "곱게 내놓으면 다치진 않을 거요." 도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예의를 갖춘 격식체였지만, 그 안에 담긴 서늘함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낮에 들었던 목소리보다 한 톤 낮았고, 말끝의 여유도 사라져 있었다. 서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섯 명이 사방을 막고 있는 상황, 도망칠 곳은 없었다. 처마 위로 보이는 좁은 하늘 조각마저 구름에 가려 별빛 한 점 새어들지 않았다. '여기서 원작의 이서윤이었다면.' 서윤은 짧게 생각했다. 원작에서는 이 장면에서 짐을 빼앗기고 크게 다쳤을 것이었다. 몇 줄로만 스쳐 지나갔던 장면이었는데, 그 몇 줄 뒤에 이런 냉기와 두려움이 실제로 존재했을 거라는 걸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지금의 서윤에게는 원작에는 없던 것이 하나 있었다. 이서윤이 왕립 마법학원에서 수년간 갈고닦은 마법이었다. 서윤은 손끝을 가볍게 튕기며 낮게 주문을 읊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음절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 순간 도현의 발밑 돌바닥이 얼음처럼 얼어붙었고, 균형을 잃은 그가 무릎을 꿇으며 넘어졌다. 단도가 손에서 미끄러져 돌바닥에 부딪히며 쨍, 하는 마른 소리를 냈다. 나머지 아이들이 놀라 뒷걸음질치는 사이, 서윤은 손바닥을 들어 올려 짧은 냉기의 파동을 골목 전체로 퍼뜨렸다. 순식간에 아이들의 발밑이 모두 얼어붙었고, 몇몇은 그대로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누군가는 짧은 비명을 삼켰고, 누군가는 그대로 벽에 등을 붙인 채 얼어붙은 자기 발을 내려다보며 굳어 있었다. 서윤은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짐 보따리를 다시 고쳐 메었는데, 딱히 더 손을 쓸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이게 이렇게까지 될 일이었나.' 서윤은 살짝 김이 빠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도현이 얼어붙은 바닥에서 억지로 일어서려 했지만, 서윤이 다가가 그 앞에 서자 다시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임을 멈췄다. 단도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는데, 그것이 추위 때문인지 다른 감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서윤은 그 떨림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저 손이 조금 전까지도 자신을 향해 겨눠져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손의 주인이 더 겁을 먹은 듯 보였다. "이 정도면." 서윤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지." 도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서윤을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완전히 우위에 있다고 믿었던 상황이,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조금 전의 냉정한 계산이 사라지고, 그 대신 낯선 종류의 긴장이 떠오르는 것을 서윤은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두려움과도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 복잡한 무언가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무섭다는 감정인가, 아니면 다른 건가.' 서윤은 잠시 궁금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세밀한 감정 분석이 아니었다. 우선은 이 골목에서, 이 다섯 명의 아이들 손에서 무사히 짐을 지키는 것이 먼저였다. "항복." 도현이 짧게 내뱉었다. 그 한마디가 골목 안의 팽팽한 긴장을 단숨에 무너뜨렸는데, 나머지 아이들도 그 말에 따라 무기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중 하나는 안도한 듯 낮게 숨을 내쉬었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얼어붙은 발을 조심스럽게 문지르며 서윤을 힐끔거렸다. 서윤은 손을 뻗어 도현을 일으켜 세워주려 했지만, 도현은 그 손을 잡지 않고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서윤의 손을 잡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종류의 위협처럼 느껴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옷자락에 묻은 얼음 조각을 털어내며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았는데, 그 와중에도 시선은 서윤에게서 떼지 않았다. "당신 정체가 뭐요." 도현이 낮게 물었다. 목소리에 담긴 격식체는 여전했지만, 그 아래 깔린 경계심은 조금 전보다 몇 배는 짙어져 있었다. 마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듯한, 그런 조심스러운 눈빛이었다. "추방된 귀족." 서윤은 짧게 대답했다. 그 이상의 정보를 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서윤이라는 이름을 굳이 밝혀서 좋을 일은 없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도현은 그 대답을 곱씹는 듯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얼어붙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서윤은 아까 낮에 목격했던 그 냉혹한 우두머리의 얼굴이 아니라, 조금 더 계산적이고 조금 더 신중해진 다른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방금까지 상대하던 먹잇감이 갑자기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으로 바뀌어버린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이 도시에서." 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같은 힘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소." 그 말에 서윤은 살짝 웃었다. 이서윤의 마법 실력이 원작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 도시 안에서 이 정도로 특별하게 받아들여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정도가 특별한 거면, 대체 이 도시엔 뭐가 있는 거지.' 그런 궁금증도 잠시 스쳤지만, 지금 당장 물어볼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서윤이 되물었다. "이제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인데." 도현은 잠시 서윤의 얼굴을 살피더니,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 눈빛에는 조금 전까지의 경계심 대신, 뭔가를 재빠르게 계산하는 듯한 번쩍임이 스쳤다. "당신 밑으로 들어가고 싶소." 골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얼어붙은 바닥 위로 아이들의 숨소리만이 낮게 깔렸고, 서윤은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잠시 도현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방금까지 자신을 위협하던 소년단의 우두머리가, 이제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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