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당해 죄인 도시 접수합니다

2화

흑월성으로 가는 길은 나흘이 걸렸고, 마차 바닥의 나무 냄새와 젖은 짚 냄새가 뒤섞인 좁은 공간 안에서 서윤은 흔들림에 맞춰 몸을 웅크린 채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응시했다. 처음 하루는 온몸이 뒤틀릴 만큼 겁이 났고, 둘째 날은 그 겁마저 무뎌져 그저 멀미와 허기만 남았는데, 셋째 날이 되자 오히려 이상한 평온이 찾아왔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면, 겁먹는 데 체력을 쓰느니 눈이라도 감고 자는 게 낫지.' 그런 계산이 스스로도 어이없어 서윤은 마차 벽에 이마를 기댄 채 잠시 웃었다. 왕도의 화려한 석조 건물들이 점점 낮고 초라한 형태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며, 이서윤이라는 몸이 이 세계에서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었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저택들이 사라지고, 벽돌과 흙으로 얼기설기 세운 집들이 늘어나고, 마지막에는 그마저 없이 짚과 나무판자를 덧댄 움막들이 이어졌다. 세상이 층층이 나뉘어 있다는 걸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호송병들은 서윤을 특별히 예우하지도, 특별히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는데, 그 무관심한 태도가 오히려 이 여정이 그녀의 삶에서 얼마나 큰 전환점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왕가의 눈치를 보느라 화형만 겨우 면했을 뿐, 이제부터는 아무도 그녀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차가 잠시 멈출 때마다 병사들은 서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육포를 나눠 먹거나 물통을 돌렸는데, 그 무심한 등짝을 보면서 서윤은 '아, 나 이제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걸 몸으로 배웠다. 흑월성의 성문이 눈에 들어왔을 때, 서윤은 잠시 숨을 멈췄다. 낡은 성벽 위로 검은 이끼가 뒤덮여 있었고, 성 안쪽에서는 연기가 곧게 솟아오르는 대신 이리저리 흩어지며 낮게 깔려 있었는데, 그 광경이 마치 오래전에 버려진 세트장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성벽 틈새로 삐죽 자란 잡초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서윤은 이곳이 원작 속에서 묘사되던 것보다 훨씬 낡고 훨씬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소설 속 문장으로만 읽었을 때는 몰랐던, 습기와 재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호송병들은 성문 안쪽까지 서윤을 데려다놓고는 짐 보따리 하나만 내려준 채 서둘러 돌아가버렸고, 그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서윤은 처음으로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등 뒤로 마차 바퀴 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서윤은 짐 보따리를 끌어안듯 품에 붙이고 서 있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발밑의 돌바닥이 유난히 차게 느껴졌다. 돌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골목 사이사이에서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서윤에게로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는데, 그 시선들에는 호기심보다 계산이 더 많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새로 들어온 죄인의 짐 보따리가 무엇을 담고 있을지 가늠하는 눈빛들이었다. 낡은 창문 너머로, 문틈 사이로, 심지어 지붕 위에서도 몇몇 그림자가 움직이는 게 보였는데, 그 은밀함이 이 성 전체가 하나의 생존 규칙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신경이 곤두서게 만드는 시선 하나가 있었다. 골목 어귀 담벼락에 기대선 소년이었는데, 나이는 열대여섯쯤 되어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그보다 훨씬 나이 든 사람의 것처럼 차가웠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반쯤 가리고 있었고, 허름한 옷차림 사이로 드러난 팔뚝에는 오래된 상처 자국이 여러 개 겹쳐 있었다. 상처들은 하나같이 오래되어 흐릿했는데, 그건 이 소년이 이런 종류의 싸움을 처음 겪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소년이 천천히 다가오자 그 뒤로 또래 아이들 몇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는데, 하나같이 눈빛이 날카롭고 몸놀림이 은밀했다. 여섯, 아니 일곱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었는데, 저마다 낡은 몽둥이나 짧은 칼자루를 소매 안에 숨기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서윤은 그들의 접근을 보며 원작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흑월성 소년단, 리더 도현.' 다섯 살 여동생을 돌보는 고아들의 우두머리, 훗날 이서윤의 가장 충실한 정보망이 되는 인물.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도현은 조력자가 아니라 명백한 위협이었다. "짐을 두고 가시오." 도현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명령형이었지만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우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자의 태도처럼 느껴져 서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목소리에 억양조차 실려 있지 않다는 게, 이런 일을 이미 수십 번쯤 해봤다는 방증처럼 들렸다. 서윤은 짐 보따리를 슬쩍 뒤로 당기며 도현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원작에서는 이 장면이 어떻게 흘러갔더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원작의 이서윤은 이 첫 만남에서 짐을 빼앗기고 크게 다친 채로 골목에 쓰러졌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굴욕이 그녀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짐도 잃고, 자존심도 잃고, 그 바닥에서부터 다시 기어올라오는 이야기였다. '그럼 이번엔 조금 다르게 가야겠지.' 굳이 그 굴욕을 똑같이 되풀이할 이유는 없었다. 서윤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손끝이 떨리는 걸 감추려 짐 보따리 끈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싫다면?" 서윤의 대답에 도현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묘하게 흔들렸다. 여기까지 끌려온 귀족 영애라면 보통 두려움에 떨거나 애원을 하는 게 정상이었을 텐데, 눈앞의 여자는 오히려 되묻고 있었다. 도현은 그것을 무모함으로 해석했는지 짧게 웃음을 흘리며 손짓을 했고, 뒤에 있던 아이들이 서윤을 둘러싸듯 거리를 좁혀왔다. 좁혀오는 아이들의 발소리는 신기하게도 거의 나지 않았는데,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싫으면 다치는 거고." 짧은 그 말에 서윤은 속으로 헛웃음이 났다. '나 이 대사 알아. 이거 원작 그대로잖아.' 그런데도 왜 이 순간이 하나도 무섭지 않은지,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지는지, 서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한 번 화형대 위에서 죽음을 코앞에 뒀던 기억이, 이런 골목 위협쯤은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는지도 몰랐다. 도현이 손을 뻗어 짐 보따리 끈을 잡아채는 순간, 서윤은 반사적으로 그 손목을 붙잡았다. 손끝에 닿은 도현의 손목은 놀라울 만큼 앙상하고 차가웠는데, 그 촉감이 순간 서윤의 마음 한구석을 건드렸다. 원작에서 읽었던 그의 사정—굶주림, 동생, 그리고 그가 지켜야 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던 것이다. 이 앙상한 손목의 주인이 다섯 살 여동생을 먹이기 위해 매일 이런 짓을 반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 한구석이 시큰했다. 하지만 지금은 동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 손 놓지 않으면." 서윤이 낮게 말했다. 도현의 눈빛이 순간 흠칫 흔들리는 것이 보였는데, 그 미묘한 균열이 서윤에게는 아주 작은 승리처럼 느껴졌다. 도현으로서는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짐을 빼앗기 위해 손목을 잡히는 쪽은 늘 자신이었지, 상대의 손목을 오히려 붙잡아 세우는 먹잇감은 처음이었을 테니까. 골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가운데, 도현의 손이 서서히 힘을 더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뼈마디가 서로 맞부딪히는 듯한 통증이 손등을 타고 올라왔지만 서윤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뒤에 둘러선 아이들 중 하나가 슬쩍 발을 옮기며 몽둥이를 고쳐 잡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조그만 움직임 하나에도 서윤의 심장이 크게 한 번 튀어 올랐다. 서윤은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이대로 이 대치가 얼마나 더 이어질지 가늠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도현의 눈동자 안에서 망설임과 자존심이 번갈아 스쳐가는 것이 보였고, 그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의 시선도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골목 저편, 어느 지붕 위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이 광경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서윤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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