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냄새였다. 오래된 석재와 향초,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옅은 피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는데, 그것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하게 느껴져서 강나연은 잠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의 감촉이 무릎을 통해 전해져 왔고, 그 위로 늘어진 치맛자락의 무게감마저 이상하게 낯설었다.
서른이 다 되어가는 직장인의 뇌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야근 후 택시 안에서 졸다가 어딘가로 쿵 떨어지는 감각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건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수백 개의 촛불로 일렁이고 있었고, 붉은 융단이 깔린 넓은 홀에는 낮은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그 한복판에 무릎 꿇은 자세로 앉아 있는 자신의 두 손—희고 가느다란, 자신의 것이 아닌 손이었다. 손톱 끝에 남은 옅은 상처 자국까지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이서윤.' 이름 하나가 머릿속에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후작가의 영애, 정략 혼약자 왕태자 정휘의 파혼 상대이자, 이 세계에서 가장 사랑했던 악역. 나연이 밤마다 웹소설 화면을 넘기며 열광했던 바로 그 캐릭터의 몸속에, 지금 자신이 들어와 있었다.
판단이 서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삼 초도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짧은 틈 사이로 이서윤이라는 인물의 열일곱 해가 통째로 흘러들어왔다. 후작가의 정원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 왕궁 예법 수업을 받으며 손등을 얻어맞던 기억, 정휘와 처음 마주쳤던 무도회의 눅눅한 밤공기까지—전부 낯선데도 이상하게 손에 잡히듯 선명했다. 나연은 그 기억의 홍수 속에서도 이상하게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이야기의 뒷부분을, 이 재판정의 끝을,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모든 배신과 파국을 이미 몇 번이나 읽었기 때문이었다.
정면 단상 위에 앉은 국왕과 그 옆에서 굳은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왕태자 정휘, 그리고 그의 그늘 아래 얌전히 고개를 숙인 성녀 유하은. 세 사람의 배치를 확인한 순간 나연은 속으로 짧게 되뇌었다. '아, 여기구나.' 단죄식. 원작 3권의 클라이맥스, 이서윤이 악마와 계약해 왕태자를 저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화형대로 끌려가던 그 장면이었다. 몇 번을 읽었던지, 대사 순서까지도 어렴풋이 기억날 정도였다.
"이서윤 영애는 악마 계약의 증좌인 저주석을 소지한 것으로 확인되었소."
재판관의 목소리가 홀 전체에 울려 퍼졌고, 방청석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목재로 짠 방청석 난간이 삐걱이는 소리, 누군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는 소리까지 서윤의 귓가에 선명하게 박혔다. 나연은—아니, 이제는 서윤이라 불러야 할 이 몸의 주인은—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어 정휘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빛에는 확신이 아니라 죄책감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시선은 서윤에게 닿았다가 곧 허공으로 흩어졌다. 원작에서도 그랬다. 정휘는 유하은에게 완전히 조종당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서윤은 저주석이라는 물건이 애초에 자신의 방에서 나온 게 아니라, 유하은의 시녀가 몰래 심어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원작 독자였으니까. 심지어 그 시녀의 이름까지도, 그녀가 나중에 흑월성 어느 골목에서 죽는다는 결말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진실을 밝혀 무죄를 증명하는 순간, 이서윤이라는 캐릭터에게 예정된 진짜 결말—죄인의 도시 흑월성에서 시작되는 두 번째 인생,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가 쌓아 올리는 압도적인 강자로서의 서사가 통째로 사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죄를 증명해서 여기 계속 남는 것보다는.' 서윤은 생각했다. '차라리 도망치는 쪽이 남는다.'
그것은 이상한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나연에게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서윤이라는 캐릭터를 사랑했던 이유는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 때문이었으니까. 무법도시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 결국 그곳의 지배자로 우뚝 서는 여자. 그 이야기의 첫 페이지가 지금 이 재판정이었다. 여기서 발버둥 쳐서 무죄를 받아내는 결말은, 나연이 진짜로 원하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서윤은 일부러 손끝을 떨었고,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배우가 대본을 외우듯,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던 장면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저는… 죄를 인정합니다."
짧은 그 한마디에 홀 전체가 얼어붙었다. 촛불 흔들리는 소리마저 멎은 것 같은 정적이었다. 정휘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서다가 다시 앉는 것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동요가 죄책감에서 나온 것인지 당혹감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다물었는데, 그 모습이 서윤의 눈에는 우스울 만큼 뻔하게 읽혔다. 유하은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가 다시 온화한 미소로 돌아가는 것을, 서윤은 놓치지 않았다. 그 미소의 각도, 눈썹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저건 계산이 틀어진 얼굴이네.' 서윤은 속으로 웃었다. 유하은은 서윤이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며 발버둥 치다가 화형에 처해지는 그림을 원했을 텐데, 정작 당사자가 순순히 죄를 인정해버리니 각본이 어긋난 것이었다. 저 완벽한 성녀의 얼굴 뒤편에 숨겨진 그 초조함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홀 안에 서윤 하나뿐일 것이었다.
재판관은 잠시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증거의 신빙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된 상태에서의 자백이라 완전한 처형보다는 감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국왕은 미간을 좁힌 채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규칙적으로 홀에 울려 퍼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서윤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죽음보다는… 살아서 죄를 씻고 싶습니다."
방청석 어딘가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후작가 사람인 것 같았는데, 서윤은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태호 후작은 이미 딸을 포기한 눈빛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시선이 등에 닿는 것 같아 목덜미가 서늘해졌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에 매몰될 때가 아니었다. 지금 흔들리면, 지금까지 쌓아온 이 짧은 연기가 전부 무너질 것이었다.
결국 재판관은 판결을 내렸다. 사형 대신 무기한 추방형. 왕국 밖 죄인의 도시, 흑월성으로.
판결이 낭독되는 순간 서윤의 입가에는 아주 옅은, 남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미소가 걸렸던 것 같은데, 그것을 유일하게 눈치챈 사람은 다름 아닌 정휘였다. 그는 그 미소를 보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자신이 파혼을 요구했고, 자신이 그녀를 이 자리에 세웠는데도, 정작 저 여자가 웃는 모습을 보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목덜미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호송병들이 다가와 서윤의 양팔을 붙잡았고, 차가운 사슬이 손목에 감기는 감촉이 낯설게 느껴졌다. 쇠의 냉기가 살갗에 닿는 순간 짧게 숨이 멎었지만, 서윤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끌려나가는 동안 서윤은 딱 한 번 고개를 돌려 방청석을 훑어보았는데,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그 시선 끝에서 유하은과 눈이 마주쳤다.
유하은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편에 아주 작은 균열이 스치는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가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가 다시 펴지는 것을, 서윤은 정확히 보았다. '한 수 밑이네.' 서윤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그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저 온화한 미소 뒤에 정말로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다음 수를 준비해두고 있는 것인지—서윤은 알지 못했다. 원작 어디에도 이 순간 유하은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홀의 문이 무겁게 열리며 차가운 바깥 공기가 밀려들었다. 그 너머로 펼쳐질 흑월성이라는 미지의 도시를 향해, 서윤은 사슬에 묶인 손을 늘어뜨린 채 첫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