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 이경헌 시점
서연이 그 종이를 보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나는 문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노명자가 저걸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건 원래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게 숨겨둔 것이었는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진정해야 했다. 여기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면,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오 년 전, 내가 남부의 작은 마을에 잠시 머물렀을 때였다. 신분을 숨기고 상단 일을 배우겠다며 몇 달간 떠돌던 시기였다. 그때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서로를 대하는지 배우고 싶었다. 저택 안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때 만난 소녀가 있었다.
담색 갈색 머리에, 꿀색 눈을 가진 소녀였다.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데도, 스스로 뭔가를 지키려는 눈빛이었다.
시장 한구석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그날 짐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고, 그 소녀는 낡은 옷을 입고도 허리를 곧게 펴고 걷는 사람이었다. 그 걸음걸이가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이 짐, 여기까지 옮겨주면 되나요?"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그녀는 나를 한 번 훑어보고는 짧게 웃었다.
"신참이신가 봐요.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요."
그 말투가 편했다. 며칠 동안 계속 마주치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마주칠 때마다 몇 마디씩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떠나기 전날, 그 소녀가 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자기가 좋아하는 시를 적었다며,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이거 그냥…… 심심할 때 써본 거예요. 딱히 특별한 건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그 종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몇 년 동안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짐을 다 뒤져보고, 그때 머물렀던 여관 주인에게까지 물어봤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얼마 전, 한서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소녀를 떠올렸다. 확신은 없었다.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세상에 담색 갈색 머리, 꿀색 눈을 가진 사람이 한 명뿐일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결혼식장에서 그녀의 눈을 본 순간, 확신이 들었다. 같은 눈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던 걸 기억한다. 예식이 진행되는 내내 나는 그녀의 옆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서둘렀다. 그래서 그렇게 뭐든 해주고 싶었다. 오 년 전에 지켜주지 못했던 만큼, 이제는 뭐든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한 번도 나를 알아보는 눈빛을 보인 적이 없었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듯 했다. 그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시 내가 사람을 착각한 걸까. 아니면 그녀가 그 기억을 잃어버린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걸까.
세 가지 가능성을 놓고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답이 나올 리 없는 고민이었다.
노명자가 저 종이를 어디서 찾았는지 물어봐야 했다. 나는 저택 안 그 누구에게도 그 종이의 존재를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어머니에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저기, 노명자."
방문 앞에 다가서서 낮게 불렀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게 나왔던 것 같다.
안에서 서연이 놀란 듯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손에 든 종이를 슬쩍 등 뒤로 감추려는 것도 보였다. 그 어설픈 몸짓이 오히려 더 눈에 밟혔다.
노명자가 나를 보고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리, 이건……."
"그거 어디서 찾았지?"
내 목소리가 평소보다 딱딱하게 나왔다는 걸 나 자신도 느꼈다. 노명자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부인 짐 속에서요.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필체가 너무 예뻐서 부인께 여쭤보려던 참이었어요."
부인 짐 속에서.
그 말이 뜻하는 건 하나였다. 저 종이가, 애초에 서연의 것이었다는 뜻이다.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그녀가 계속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이 종이를 짐 속 어딘가에 넣어두고 살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자기가 예전에 쓴 시를 우연히 다시 가지고 있게 된 걸까.
두 가능성 사이에서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만약 기억하고 있다면,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만약 기억하지 못한다면, 왜 이 종이를 버리지 않고 계속 가지고 다녔을까.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혼란 그 자체였다. 마치 자기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얼굴.
"이거…… 제가 쓴 거긴 한데, 언제 썼는지 기억이 안 나요."
그녀가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쳐 다시 들여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눈동자가 그 위를 몇 번이나 오갔다.
"필체는 제 거 같은데…… 이상하네요. 이런 시를 쓴 기억이 전혀 없는데."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기억이 안 난다는 게, 그 시절 자체를 잊어버렸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저 이 종이 하나만 잊어버렸다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노명자가 눈치를 살피며 슬쩍 방을 빠져나갔다. 나와 서연, 단둘만 남았다.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창밖에서 새 우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이 종이는 오 년 전 내가 그 소녀에게서 받았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필체로 쓰여 있었다. 종이 끝에 접힌 자국까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소녀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서연은, 분명히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그때의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서연이 종이를 다시 접으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뭔가를 묻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눈빛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궁금한 것을 참는 사람 특유의 눈빛이었다.
"저, 나리."
"……왜."
"이 종이, 혹시 뭔지 아세요? 표정이 좀…… 이상하셔서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표정을 숨긴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이미 뭔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니, 모른다."
거짓말이 이렇게 서투르게 나온 건 오랜만이었다. 서연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이 결혼이 단순한 계약 이상의 무언가로 얽혀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과 동시에, 새로운 불안이 스며들었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연 때문이라면.
기억을 잃어버린 것과, 애초에 그 시절을 통째로 지워야 했던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만약 후자라면, 그 이유는 결코 가벼울 리 없었다.
이 저택 어딘가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하나 더 숨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었다.
서연이 그 종이를 조심스럽게 서랍 안에 넣는 걸 지켜봤다. 그녀의 손끝이 서랍을 닫는 순간까지도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무언가가, 우리 두 사람 모두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