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남편의 지나친 사랑

3화

결혼한 지 열흘도 안 됐을 때, 친정에서 연락이 왔다. 하인 하나가 편지를 들고 급하게 온 걸 보고, 나는 그게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았다. 이 집안 사람들이 나한테 좋은 소식으로 연락한 적이 있었나. 없었다. 단 한 번도. 편지를 받아 든 손끝이 살짝 굳었다. 봉투를 뒤집어보니 익숙한 밀랍 인장. 아버지 것도 아니고, 오빠 것도 아니었다. 언니의 인장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편지를 열어보니 언니 한서인의 필체였다. 늘 그렇듯 급하게 흘려 쓴 글씨, 자기 편할 대로만 흘러가는 문장. 『서연아, 다음 주 자선 바자회에 내가 준비할 게 너무 많아. 네가 좀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이번엔 좀 더 크게 하는 거라서, 네가 하던 것처럼 재봉이랑 준비물 정리를 좀 맡아줘. 나 요즘 너무 바빠서 그래.』 읽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이었다. 바자회 준비. 재봉. 준비물 정리. 예전에 내가 밤새워 하던 일들이 그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때는 손끝이 부어터지도록 바늘을 잡았고, 아침이면 눈두덩이가 시커멓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은 늘 언니의 이름으로 나갔다. '한서인 양이 손수 준비한 자선 바자회'라는 문구를 보면서, 나는 그저 뒤에서 웃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결혼했다고, 남의 집 안주인이 됐다고 해도 저 사람들 눈에는 여전히 편하게 부려먹을 수 있는 도구인 거구나. 편지 아래엔 어머니 임정숙의 짧은 메모도 있었다. 『이번엔 꼭 도와드려라. 언니가 힘들다고 하는데 그냥 지나칠 셈이니.』 힘들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까지 힘들다는 말을 백 번도 더 들었다. 언니가 힘들다, 오빠가 바쁘다, 동생이 벅차다. 그리고 그 뒤엔 항상 내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언니의 숙제를 대신 하고, 오빠의 실수를 대신 사과하고, 동생의 변명을 대신 만들어주는 게 내 역할이었다. 방학이면 나만 늦게까지 자수틀 앞에 앉아 있었고, 명절이면 나만 부엌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가 살짝 웃어주었으니까. 그 웃음 하나가 뭐라고 그렇게 애를 썼는지.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그 웃음은 대가가 아니었다. 그냥 내가 알아서 바쳤던 것뿐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나는 편지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서랍을 닫는 손이 묘하게 담담했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재봉함을 꺼내 놓고 밤새 실을 꿰고 있었을 시간에, 나는 그냥 서랍을 닫고 창밖을 봤다. 답장을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짧게 몇 줄만 적었다. 『이번 일은 도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저도 여기 적응하는 중이라서요.』 적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손이 살짝 떨렸다. 처음으로 거절이라는 걸 써봤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문장이 너무 짧아서 부족한가 싶다가도, 더 길게 쓰면 결국 변명처럼 보일 것 같아서 그냥 두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넣지 않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세 줄쯔음 사과를 늘어놓았을 텐데. 이렇게 쉬운 걸 왜 지금까지 못 했을까. 편지를 인장으로 봉하면서 손끝에 힘을 줬다. 밀랍이 굳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하인에게 편지를 건네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편지를 보내고 나서, 저녁 식사 자리에서 경헌이 물었다. 식탁 위엔 국물이 담긴 그릇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오늘 낮에 친정에서 편지가 왔다던데." "네, 별거 아니었어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높았던 것 같다. "별거 아닌 걸로 얼굴이 그렇게 굳어 있었어?" 들켰나. 나는 애써 표정을 풀었지만, 경헌의 눈은 이미 뭔가를 캐치한 뒤였다. 저 사람은 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숟가락질 하나에도 눈치를 채는 것 같았다. "부인 집안에서 뭘 요구했나." 요구라는 단어가 정확했다. 이 사람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원래 저 집안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요, 정말 별거 아니에요. 그냥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어요." 말을 끝내고 나서야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실감이 났다. 거절했어요. 이 말을 내가 이렇게 담담하게 뱉을 수 있게 되다니. 경헌은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스치는 게 보였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살짝 안도한 것 같기도 했다. "잘했어."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에 담긴 무게가 이상하게 크게 느껴졌다. 살아오면서 누군가 내 거절을 칭찬해준 건 처음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심지어 나 자신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앞으로도 저 집안에서 오는 요구는 전부 나한테 먼저 알려줘. 부인이 직접 상대할 필요 없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 단호한 어조였다. 명령형이었지만, 이번에도 그 안에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보호하려는 마음 같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나는 그냥 계약으로 팔려온 아내일 뿐인데. 저 사람이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나는 그냥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국물이 조금 식어 있었다. 그래도 맛은 괜찮았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들었다. 창밖으로 달빛이 은은하게 들어오고, 방 안 공기가 서늘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따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절이라는 걸 해봤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나는 혼자 조금 웃었다. 별것도 아닌데, 정말 별것도 아닌데. 이렇게 별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까지 잠이 잘 오는 게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사흘도 가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다시 하인이 급히 편지를 들고 왔다. 이번엔 언니의 인장이 아니었다. 봉투를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버지의 인장이었다. 아버지가 직접 편지를 보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급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봉투를 뜯는 손끝이 살짝 굳는 걸 느끼며, 심장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편지를 펼쳤다. 그 안에는 언니의 요청이 아니라 아버지의 필체로 적힌 훨씬 무거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네 언니와 혼인을 논의하던 윤재하 남작이 화가 많이 났다. 네가 그 자리를 가로챘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빨리 해결해라.』 윤재하 남작이라니.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가 언니의 혼처를 가로챘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나는 그 사람의 얼굴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손에 쥔 편지가 파르르 떨렸다. 빨리 해결해라, 라는 그 짧은 문장이 마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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