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혼인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화려한 왕실 결혼식과 정반대로, 양가 가까운 사람들만 모인 소박한 예식이었다. 신부의 부케도 없었고, 백 명이 넘는 하객도 없었다. 그저 정원에 놓인 흰 천막 하나, 조촐한 음악, 그리고 서로 아는 얼굴들뿐이었다.
나는 그 소박함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이헌 왕자와의 그 화려했던 파혼식 아닌 파혼식을 떠올리면, 이 조용함은 차라리 축복 같았다. 조명도 없고, 시선도 없고, 손을 놓치는 순간을 지켜보는 수천 개의 눈도 없었다. 나는 그저 정하준의 손을 잡았고, 그는 내 손을 잡았다. 그게 전부였다.
결혼 후 청명 백작가로 옮겨온 지 한 달, 나는 이 저택의 규칙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침에는 정원사가 장미 넝쿨을 손질하는 소리로 눈을 뜨고, 오후에는 서재에서 책 넘기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렸다. 저택 전체가 조용한 리듬으로 돌아갔다. 왕궁의 소란스러움과는 전혀 다른, 낮게 깔린 안정감이었다.
정하준의 어머니, 윤설아 백작부인은 놀랍도록 다정한 사람이었다.
"서윤아."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며느리라는 호칭도, 아가라는 호칭도 없이, 그냥 이름으로.
"네 어머니와 나는 학원 시절부터 친구였다. 그러니 너도 내 딸이나 마찬가지야."
어머니, 박서희 부인과 윤설아 부인이 오랜 친구였다는 사실을 나는 결혼 전까지 몰랐다. 알고 보니 이 결혼이 완전한 우연도 아니었던 셈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조금 웃었다. 어머니들의 계획이 딸들의 인생을 이렇게 엮어버릴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티 안 내고, 조용히, 완벽하게.
윤설아 부인은 종종 나를 응접실로 불러 차를 나눠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은 시시콜콜한 것들이었다. 정원에 새로 심은 라벤더 이야기, 요리사가 새로 배워온 디저트 레시피, 하준이 어릴 때 벌레를 무서워했다는 이야기까지.
"그 애가 곤충은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전장에서는 태연하다더구나. 이상한 아이야."
그렇게 웃던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정하준과 닮은 구석을 하나 발견했다. 눈매가 아니라, 담백하게 사실만 말하는 그 말투였다.
정하준은 예상보다 더 이상한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식사 자리에서 그는 나를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저예요, 서윤이요."
"압니다. 목소리와 걸음걸이로 알아봅니다. 다만 얼굴로는 확인이 안 되니 매번 인사를 다시 드리는 겁니다."
처음엔 매번 당황했는데, 이제는 이 반복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오히려 안정감이 있었다. 매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하루. 예측 가능하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결혼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는 나를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목소리, 걸음걸이, 향, 말투의 습관까지. 언젠가 내가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잠겼을 때, 그는 며칠 동안 아침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정확히는, 당황한 얼굴이라기보다 미묘하게 미간을 좁히는 정도였지만.
"목소리가 다릅니다."
"감기 걸려서 그래요."
"그렇군요. 그럼 걸음걸이로 확인하겠습니다."
그 대화가 얼마나 웃겼는지,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실실 웃었다. 이 남자는 사람을 알아보는 방식조차도 매뉴얼처럼 정리해둔 게 분명했다.
"오늘 서재에 새로 들어온 지도를 봤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가 불쑥 말했다.
"설영 후작가의 영지 경계가 왕국 북부 국경선과 거의 맞닿아 있더군요. 그 규모의 사병을 유지하려면 상당한 재정이 필요할 텐데, 후작가의 재정 상태는 겉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견고합니다. 그동안 왜 이 사실이 궁정에서 크게 조명되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놀랐다. 그는 결혼 상대의 가문을 이런 식으로, 정치적 자원으로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마치 아침 식사 메뉴를 읽듯이, 별다른 감정 없이.
"아버지는 조용히 사는 걸 좋아하세요. 힘을 드러내지 않는 게 오히려 안전하다고 믿으시고요."
"현명한 판단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 힘이 필요해질 때가 올 겁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예언처럼 들려서가 아니라, 그 말투가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였다. 정하준은 늘 이런 식이었다. 감정을 담지 않고 사실만 말하는데, 그 사실이 꼭 미래를 미리 알고 하는 말처럼 무겁게 떨어졌다.
"제가 정략혼을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도 그겁니다."
그가 덧붙였다.
"청명가는 이제 후계권을 잃은 저 때문에 정치적 입지가 약해졌습니다. 하지만 설영가와의 결합은, 단순한 혼인이 아니라 실질적인 세력 균형의 변화입니다. 이건 부인도 이미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알고 있었다. 다만 아무도 그렇게 정확히 말로 꺼낸 적은 없었다. 다들 결혼을 사랑이나 인연이라는 말로 감싸려 했지, 이렇게 저울과 계산기를 들이대며 말한 사람은 없었다.
"솔직하시네요."
"거짓말을 잘 못합니다. 표정으로 사람을 못 읽으니, 상대의 반응을 계산하는 게 서투릅니다. 그래서 그냥 사실만 말합니다."
그 담백함이, 나는 좋았다. 이헌 왕자 곁에서 삼 년을 지내며 배운 건 계산된 말과 계산된 웃음이었다. 웃음의 각도, 시선의 방향,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전부 상대의 반응을 예측해서 조율해야 했다. 그런데 이 남자 곁에서는 아무것도 계산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애초에 내 표정을 볼 수 없으니, 나 역시 표정을 꾸밀 필요가 없었다.
이상한 해방감이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저택 집사가 들어와 서신 하나를 전했다. 왕궁에서 온 것이었다. 인장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살짝 막혔다. 붉은 밀랍 위에 눌린 왕가의 문양. 그 익숙한 도형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정하준이 서신을 받아 봉투를 열었다.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만난 이후 가장 미묘하게 굳었다. 눈썹이 아니라 입꼬리 옆의 근육이 살짝 당겨졌다. 나는 그 정도의 변화까지 읽어낼 수 있게 된 스스로가 조금 웃겼다.
"이헌 왕자의 이름으로 온 초청장입니다."
그가 서신을 내게 건넸다.
"이번 달 말, 왕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군요."
연회.
삼 개월 전, 내가 온 세상 앞에서 손을 놓쳤던 그 연회장이 다시 떠올랐다. 샹들리에 불빛,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내 손을 놓아버린 그 손의 온도까지. 그리고 그 자리에는 분명, 한소희도 함께 있을 것이었다. 웃는 얼굴로, 승리한 얼굴로.
"참석하실 겁니까."
정하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엔 판단도 재촉도 없었다. 그저 순수한 질문이었다. 그게 오히려 더 어려운 질문으로 느껴졌다.
나는 서신을 손에 쥔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참석하지 않으면 도망친 걸로 보일 것이고, 참석하면 다시 그 시선들 속에 서야 한다. 삼 개월 전과 똑같은 그 시선들. 동정과 조롱이 뒤섞인, 가장 견디기 힘든 종류의 시선.
그때 문득,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이번엔 다르다. 지난번엔 혼자였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옆에는 표정을 읽지 못해도 목소리로 나를 알아보는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는 최소한 나를 배신할 계산 같은 건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참석할게요."
나는 서신을 다시 접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엔 웃음의 각도를 다르게 계산해야겠네요."
정하준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저는 웃음의 각도는 계산 못 합니다. 하지만 부인이 필요하다면 옆에 있겠습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어떤 계산된 위로보다도 더 마음을 편하게 했다.
문제는, 그 연회에 누가 또 참석할지 아직 알 수 없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