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정략혼 논의는 놀랄 만큼 빠르게 진행됐다. 양가 부모끼리 상견례 날짜를 잡는 데 사흘이 걸렸고, 첫 만남은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 뒤였다.
일주일. 파혼당한 지 겨우 열흘 만에 새로운 혼처가 정해지고, 그 혼처의 상견례 날짜까지 잡힌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속도인지, 나는 마차에 오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헌과의 삼 년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는데, 새 인연은 이렇게 순식간에 시작된다.
인생이 참 무례하다.
어머니는 마차 안에서 내 옷매를 세 번이나 고쳐줬다. 옷깃을 다듬고, 소매를 펴고, 머리 장식을 살짝 기울였다가 다시 원위치로. 나는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상대는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사람이니, 옷매가 완벽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어머니에게는 이게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였을 테니까.
"정신 차려, 서윤아. 이번엔 다를 거야."
"알아요, 어머니."
다를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다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청명 백작가의 저택은 소문보다 소박했다. 후계 자리를 잃은 장남이 있는 집이라 어딘가 위축된 분위기일 거라 예상했는데, 오히려 정원이 잘 가꿔져 있었고 실내는 차분한 초록빛과 나무색으로 정돈돼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다웠다.
솔직히 좀 놀랐다. 사교계 소문으로는 이 집안이 정하준 때문에 반쯤 몰락한 것처럼 그려졌으니까. 결함 있는 후계자, 대외활동을 전혀 못 하는 은둔형 장남, 그런 식으로. 그런데 정원의 장미는 손질이 잘 되어 있었고, 현관을 들어서면서 맡은 냄새는 오래된 나무와 은은한 허브향이었다. 방치된 집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냄새였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크고, 자세가 곧았다. 짙은 색 머리,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 정하준이었다.
첫인상은, 냉정하다기보다는 정지된 느낌이었다. 표정이 없는 게 아니라, 표정을 쓸 이유가 없다는 듯한 얼굴. 나는 순간적으로 그 얼굴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가, 곧 그럴 리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남자를 실제로 마주친 건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정하준입니다."
인사가 짧았다. 나도 짧게 인사를 받았다.
"이서윤입니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마치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어떤 대상을 처음부터 관찰하듯 훑는 눈이었다. 실례라고 느낄 법도 한데,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편했다. 이헌은 늘 나를 볼 때 어떤 기대를 담아 봤다. 완벽한 신붓감, 흠 없는 파트너, 그런 틀에 맞는지 확인하는 시선. 그런데 이 남자의 눈에는 그런 기대가 없었다. 그냥 봤다. 있는 그대로.
"실례지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사람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서윤 양의 얼굴을 아무리 자세히 봐도, 내일 다시 만나면 전혀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다들 이 말을 사전에 조심스럽게 꺼냈을 텐데, 그는 아무 감정도 섞지 않고 사실만 말했다. 그 담백함이 오히려 신선했다.
솔직히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내심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고민했다. 놀란 척? 이해한다는 척? 그런데 정하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런 연기가 다 무의미해 보였다. 이 사람은 애초에 내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알고 있습니다. 소문으로 들었어요."
"불편하십니까."
"아니요."
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저도 사교계에서 다르게 불리고 있으니까요. 상처입은 여인, 이라고."
말을 뱉으면서도 스스로 웃겼다. 상처입은 여인. 그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짜증이 났었다. 상처는 내가 입은 게 맞지만, 그렇게 불쌍한 존재로 규정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미묘한 변화였지만 분명히 있었다. 눈썹이 살짝 좁혀졌다가, 입가가 아주 조금 굳어졌다.
"틀린 평가군요."
"네?"
"상처입은 여인이라는 평가 말입니다. 틀렸습니다."
그가 자리에 다시 앉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사람의 얼굴은 기억 못하지만, 사물의 본질은 정확히 봅니다. 서윤 양이 삼 년간 왕자궁에서 처리한 문서와 정책, 그 배후에 있던 계산들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지역별 배급안, 사절단 의전 순서 조정, 재정 회의 자료. 이건 지루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이 사람이 그걸 알고 있다니. 삼 년을 함께한 이헌조차 몰랐던 일을, 오늘 처음 만난 이 남자가 알고 있었다. 배급안을 짜기 위해 밤을 새운 날들, 사절단 순서 하나 때문에 세 시간 동안 회의를 했던 기억, 재정 자료를 스무 번쯤 다시 검토했던 날들. 그 모든 걸 이헌은 몰랐다. 아니, 몰랐던 게 아니라 관심이 없었던 거겠지.
"어떻게 아셨나요."
"저는 사람의 얼굴은 못 알아보지만, 서류의 필체와 논리는 완벽하게 기억합니다. 서윤 양이 왕궁에서 작성한 문서 몇 개를 확인했을 뿐입니다."
확인했을 뿐이라니. 그건 결코 '뿐'이라는 단어로 축소될 일이 아니었다. 사람의 얼굴을 못 알아본다는 사람이, 대신 문서를 뒤져서 상대의 삼 년을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나 같으면 상견례 전에 상대 얼굴이라도 한번 그림으로 그려봤을 텐데, 이 남자는 얼굴 대신 서류를 봤다.
이상한 종류의 성실함이었다.
"저는 사람들이 저를 결함 있는 자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르게 보는 방식을 가졌을 뿐입니다. 서윤 양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르게 보는 방식.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이헌은 나를 완벽해서 지루한 여자로 봤다. 한소희는 나를 애써 완벽하려는 불쌍한 여자로 봤다. 사교계 전체가 나를 상처입은 여인, 버려진 신붓감으로 봤다. 하지만 이 남자는, 나를 그냥 정확하게 봤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삼 년을 알고 지낸 사람들보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나를 더 정확히 안다는 것.
"정략혼이니 사랑을 기대하진 않습니다."
그가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존중은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확실히 지킬 겁니다."
존중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사무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사무적인 말투가 오히려 신뢰가 갔다. 화려한 말로 사랑을 약속하고도 손쉽게 손을 놓아버린 사람을 겪은 뒤라서 그런 걸까.
이헌도 처음엔 사랑을 말했다. 영원을 말했고, 함께할 미래를 말했다. 그 모든 말이 결국 한소희 앞에서 무너지는 걸 보고 나서야, 나는 화려한 언어가 얼마나 값싼 건지 알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사랑 대신 존중을 말했다. 그것도 딱 지킬 수 있는 만큼만.
"저도 같은 걸 약속드리겠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처음으로, 파혼 이후 며칠 사이 가장 편안한 숨을 쉬었다.
대화는 그 이후로도 짧게 이어졌다. 결혼 준비 절차, 양가의 일정, 형식적인 확인들. 그는 필요한 말만 정확하게 했고, 나는 그 정확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감을 줬다. 이 사람과는 적어도 계산되지 않은 배신을 당할 일은 없겠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상견례가 끝나고 마차로 돌아가는 길, 나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저택의 정원이 점점 멀어지고, 잘 손질된 장미 덤불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결혼이 나에게 무엇을 줄지는 아직 모른다. 사랑은 없을 것이고, 어쩌면 평생 그 어떤 것도 없을 수 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남자는 적어도 나를 있는 그대로 볼 줄 안다는 것.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지금 나에게는 충분했다.
마차가 저택 대문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쯤, 나는 정하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다음에 뵐 때는, 서윤 양의 얼굴을 다시 못 알아볼 겁니다. 미리 사과드립니다."
그 말을 하면서도 그는 웃지 않았다. 사과라고 했지만 사과의 어조가 전혀 아니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그 말이 나에게는 이상하게 다정하게 들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