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분노 다음에 온 건 정리였다.
원래 나는 그런 사람이다. 화가 나면 일단 화를 내고, 그다음엔 노트를 펼친다. 감정보다 데이터가 먼저 정리되는 인간. 이헌이 나를 지루하다고 했을 때 그가 몰랐던 게 바로 이거였다. 지루한 게 아니라 효율적인 거였는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삼 년간 써온 업무 노트들을 꺼냈다. 서랍 세 개를 가득 채운 분량이었다. 이헌 왕자의 일정표, 상소문 정리본, 왕실 연회 준비 목록, 외교 사절단 접대 순서, 심지어 그가 좋아하는 다과 목록까지 따로 정리된 노트가 있었다. 하나씩 넘겨보다가 나는 문득 멈췄다.
이걸 다 내가 했구나.
당연한 사실인데 새삼스러웠다. 삼 년 동안 나는 왕자의 그림자였다. 그가 실수하지 않도록, 그가 무지해 보이지 않도록, 그가 늘 완벽해 보이도록 뒤에서 손을 썼다. 외교 사절이 왔을 때 예법을 잘못 알고 있던 왕자를 대신해 즉석에서 화제를 돌린 것도 나였고, 왕실 재정 회의에서 그가 이해 못한 부분을 미리 정리해 그의 이름으로 발표하게 한 것도 나였다. 심지어 그가 즉흥으로 한 말처럼 보였던 재치 있는 발언들도, 사실 전날 밤 내가 예상 질문지를 만들어 미리 건네준 것들이었다.
그 모든 게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걸까.
노트 한 권을 펼쳤다. 재작년 겨울, 국경 지역 식량 배급 문제로 왕실 회의가 열렸던 때의 기록이었다. 당시 대신들은 배급 우선순위를 두고 갑론을박했고, 나는 왕자의 이름으로 지역별 인구밀도와 수확량 데이터를 근거로 한 배급안을 제출했다. 밤을 새워가며 계산했던 숫자들이 페이지마다 빽빽했다. 그 안이 채택됐고, 그해 겨울 아사자는 예년의 삼분의 일로 줄었다.
그건 내가 한 일이었다. 왕자가 아니라.
다음 페이지엔 왕실 도서관 확충 계획, 그다음엔 변경 지역 도로 정비 예산안, 또 그다음엔 왕자가 즉위 후보로 거론될 때를 대비한 여론 조성 방안까지 있었다. 하나씩 넘길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무슨 왕자 매니지먼트 기획서 모음집인가.
와.
나도 몰랐던 걸 이제 알았다. 나는 지루한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무대 뒤에서 왕국의 일부를 실제로 굴려온 사람이었다. 이헌이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웃고 있을 때, 나는 그 무대의 배선을 깔고 조명을 조정하고 대본까지 써준 사람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헌이 나를 지루하다고 평가한 건, 그가 내가 무엇을 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 알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그저 완벽해서 재미없는 여자만 보였을 뿐, 그 완벽함이 어디서 왔는지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계를 보면서, 그 안에 누가 태엽을 감아넣고 있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건 그의 결함이지, 내 결함이 아니었다.
노트를 하나씩 다시 덮으면서 나는 결심했다. 이 노트들을 태우지 않기로. 언젠가 이것들이 필요할 날이 올 거라는 예감이 있었다. 근거 없는 예감이었지만, 삼 년간 데이터를 다뤄온 사람의 직감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나는 노트를 덮고 창가로 걸어갔다. 정원의 장미가 겨울을 지나며 시들어가고 있었다. 붉었던 꽃잎이 갈색으로 말라가는 걸 보고 있자니 묘하게 동질감이 들었다. 정원사가 담요라도 덮어줄까 물었을 때 나는 그러라고 했다. 다들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진지했다. 꽃도 살아있는 동안은 지켜줄 가치가 있으니까. 겨울이 지나면 다시 필지, 아니면 그대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방치할 이유는 없었다.
나 자신도 그랬다. 사교계가 뭐라 하든, 내가 해온 일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노트 안의 숫자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걸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방식이 문제였다. 왕자와의 파혼으로 잃은 위치를, 다시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사교계에 나가서 “사실 제가 다 한 거예요”라고 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증명이 아니라 자멸이었다.
그때 시녀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후작님께서 부르십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뭔가 있구나. 삼 년간 눈치로 먹고산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서재로 갔다. 이강훈 후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서신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인장이 낯설었다. 청명 백작가의 인장이었다. 붉은 밀랍에 새겨진 문양을 보는 순간, 이미 예상이 갔다. 파혼한 지 열흘 만에 뭐가 왔겠는가.
"서윤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청명 백작가에서 정략혼을 제안했다."
정략혼. 파혼 소식이 퍼진 지 겨우 열흘, 그 사이에 벌써 새로운 혼담이 들어온 거였다. 사교계란 정말 빠르구나. 파혼 소식이 아침에 퍼지면 저녁엔 벌써 새 짝을 물색하는 곳이니까.
"상대가 누구인가요."
"백작가의 장남, 정하준이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 사람. 사람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해서 후계 자리를 동생에게 넘겼다는, 그 소문의 주인공. 사교 모임에서 몇 번 스쳐 지나갔을 텐데도 나는 그의 얼굴을 정확히 떠올릴 수 없었다. 아마 그도 나를 기억 못 하겠지. 애초에 기억을 못 하는 게 그 사람의 특징이니까.
결함이 있는 여자와 결함이 있는 남자.
사교계는 이걸 두고 뭐라고 할까. 잘 어울리는 짝이라며 웃을까, 아니면 서로의 결함을 감춰줄 위장 결혼이라고 비웃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편할지도 몰랐다.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라면, 적어도 내가 지루한 표정을 짓는지 재밌는 표정을 짓는지도 구분 못 할 테니까.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받아들이겠어요."
나는 생각보다 빨리 대답했다. 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괜찮은 거냐."
"어차피 저는 이제 상처입은 여인이잖아요. 그럼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필요하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눈빛에서, 나는 죄책감이 조금 더 깊어졌다는 걸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늘 그런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뭔가를 스스로 결정할 때마다, 마치 자신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처럼.
"정말 괜찮으냐고 묻는 거다, 서윤아."
"괜찮지 않으면 뭐가 달라지나요."
내 대답에 아버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서신을 다시 내 쪽으로 밀었다.
"답신은 내일 아침까지 보내야 한다. 시간이 얼마 없어."
시간이 얼마 없다는 말이 이상하게 귓가에 남았다. 청명 백작가에서 왜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걸까. 단순히 얼굴을 기억 못 하는 아들의 혼처가 마땅치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서신을 손에 들고 서재를 나오면서, 나는 그제야 그 인장 아래 작게 찍힌 또 하나의 표식을 발견했다. 청명 백작가의 문양이 아니었다. 왕실의 부속 인장이었다.
이건 뭐지.
단순한 혼담이 아니었다. 이 안에 뭔가 다른 게 얽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