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후작저의 응접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조차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는 그저 아침 빛이었는데, 오늘은 '상처입은 여인'을 비추는 빛이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유난히 하얗다고 생각했다. 어제와 똑같은 해였을 텐데, 나는 자꾸 그 빛의 온도를 재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강훈 후작은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날 아침의 침묵은 평소와 결이 달랐다. 그는 서류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종이 끝이 파르르 흔들리는 걸 보면서, 나는 그게 서류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서류를 읽는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같은 줄을 세 번째 읽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보고 알았다. 아버지가 자책하고 있다는 걸.
"아버지."
"...괜찮다."
괜찮다는 말이 가장 안 괜찮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가 있다. 그날의 아버지가 그랬다. 후작이라는 사람이, 사교계에서 웬만한 풍파는 다 겪어봤을 사람이, 딸의 두 번째 파혼 앞에서는 그저 서류 뒤에 얼굴을 숨기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그게 슬프면서도 이상하게 웃겼다. 웃으면 안 될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느라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머니, 박서희 후작부인은 내 손을 꽉 잡았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잡은 손에 힘만 주었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어머니 특유의 향, 라벤더와 종이 냄새가 섞인 그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나는 그 온기가 좋으면서도 미안했다. 딸이 두 번이나 파혼당한 게, 마치 부모의 죄처럼 여겨지는 이 사교계의 규칙이 싫었다.
세상 어디에 그런 셈법이 있나. 딴 사람이 저지른 잘못을, 곁에서 웃어주지 못한 부모의 흠으로 계산하는 이 방식이.
첫 번째 파혼은 삼 년 전이었다. 후작가 셋째 아들이었던 그와의 혼약이 파기됐을 때는, 세간은 그저 '불운'이라고 봐줬다. 그때는 오히려 동정 어린 시선이 더 많았다. 다들 나를 가엾게 여겼고, 몇몇은 대놓고 "그 집안 아들이 원래 좀 그랬죠"라며 뒤에서 흉을 봐주기도 했다. 그 정도의 동정은 견딜 만했다.
하지만 두 번째, 그것도 왕자와의 혼약 파기는 다른 이야기였다.
한 번은 우연이지만 두 번은 결함이라고, 사교계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 판단이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정확하게 퍼지는지 나는 그 일주일 동안 몸으로 배웠다. 하녀들의 눈빛이 달라졌고, 초대장의 숫자가 줄었고, 몇몇 지인들은 마차 창밖에서 나를 보고도 못 본 척했다.
일주일 뒤, 나는 오랜만에 사교 모임에 나갔다. 나가지 않으면 도망친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였다. 도망치는 여자로 낙인찍히긴 싫었다. 차라리 다른 낙인이라면, 스스로 골라서 받고 싶었다.
마차에 오르기 전, 시녀가 내 머리를 마지막으로 다듬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정말 가시겠어요? 몸이 편찮으시다고 해도 될 것 같은데."
"괜찮아. 오늘 안 가면, 내일부터는 아예 못 나가게 될 거야."
그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확신이 없었다. 나가면 뭐가 나아지는지도 몰랐다. 그냥 물러서는 모습만은 보이지 않겠다는, 그거 하나뿐이었다.
모임 자리에서 한소희가 다가왔다. 그녀는 이제 대놓고 왕자의 옆자리를 차지한 사람이었다. 화려한 다홍빛 드레스에, 목에 걸린 목걸이는 낯익었다. 왕실 문양이 새겨진 것. 나는 그 목걸이를 보는 순간 속이 살짝 뒤틀리는 걸 느꼈지만,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삼 년간 사교계에서 배운 게 딱 하나 있다면, 표정 관리였다.
"서윤 양,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소희 양도요."
"저는 걱정을 안 하는 편이라서요. 서윤 양은 걱정이 많으신가 봐요, 늘 그렇게 완벽하려고 애쓰시니."
주변 영애들이 웃었다. 소리 내지 않고, 부채로 입을 가리고, 눈으로만 웃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잔인한지, 그날 처음 알았다. 소리 없는 웃음이 소리 있는 비웃음보다 더 아프다는 것도.
"완벽하려고 애쓴 적은 없어요. 그냥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죠."
"할 일이라니, 그게 전하를 그렇게 지치게 만들었나 봐요."
지친 건 내가 아니라 전하였다는 그녀의 말은, 삼 년간 내가 대신 처리한 그의 실수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말이었다. 밤새 서류를 붙잡고 그의 실책을 덮어주던 날들이, 그의 이름으로 대신 사과문을 써 내려가던 새벽들이, 이 여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해봐야 '지지 않으려는 상처입은 여인'이라는 다음 낙인이 붙을 뿐이었다.
"그러셨을 수도 있겠네요."
웃으며 받아치자 한소희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마 내가 울거나, 발끈하거나, 뭐라도 격한 반응을 보이길 기대했을 거다. 그 기대를 무너뜨리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격이었다.
"서윤 양은 참, 여유로우시네요."
"소희 양만큼은 아니겠지만요."
그녀가 짧게 웃었다. 진짜 웃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모임이 끝나고 마차에 오르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웃는 데에 이렇게 힘이 들 줄은 몰랐다. 마차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창밖으로 저택들이 하나씩 지나갔다. 다들 화려하고 다들 웃고 있었다. 저 안에서 오늘 나에 대한 이야기가 몇 번이나 오갈까, 세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웃어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시녀가 가져다준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손도 대지 않은 채 협탁 위에서 김이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저 차처럼, 나도 그렇게 서서히 식어가는 걸까 싶었다.
답은 없었다. 다만 창밖에서 들려오는 사교계의 소문들이, 내가 어떤 존재로 재정의되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결함이 있는 여자, 신분은 높지만 혼인은 불가능한 존재, 상처입은 여인. 그 세 단어가 이제 내 이름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을 거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울음보다 다른 감정에 더 가까웠다. 그건 분노였다.
이 웃음의 값을, 언젠가는 반드시 돌려받아야겠다고. 어떤 방식으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