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밀주 들켰더니 혼약이라니

5화

홀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현악의 선율이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수백 개의 촛불이 흔들림 없이 타오르는 가운데, 그 정적은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공기를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았고, 귀족들의 웅성거림도 하나둘 사그라들며 이내 완전한 침묵으로 화했다. 이서윤은 그 침묵이 실체를 가진 것처럼 홀 안을 메워오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숨을 얕게 골랐다. 계단 위, 황금빛 촛불이 만들어낸 어스름 속에서 국왕 이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남색 예복이 그의 걸음을 따라 물결처럼 흔들렸으며, 그 걸음걸이는 느릿하면서도 홀 전체를 발밑에 두고 있는 자의 것이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귀족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바람에 몸을 굽히는 밀밭처럼 일순간에 퍼져나갔다. 이서윤 역시 강도현의 팔에서 조용히 손을 떼며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으나, 그녀의 시선은 완전히 바닥을 향하지 못한 채 계단 위의 인물을 곁눈으로 좇고 있었다. 이헌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며 홀 안을 둘러보았다. 그 시선은 무심한 듯했지만, 실은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것처럼 느리게 움직였고, 이내 그 시선이 이서윤에게서 멈추었다. 청록빛 드레스. 성녀에게 익숙한 흰빛이 아닌, 낯선 색채였다. 그는 잠시 눈썹을 좁혔으나, 곧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었다. 그 미소는 부드러워 보였지만 어딘가 서늘한 기색을 품고 있어서, 이서윤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한기를 느꼈다. "성녀가 저런 색을 입다니, 오늘 밤은 이례적인 것들이 많군." 이헌의 목소리가 홀 전체에 울리자, 좌중의 시선이 다시 이서윤에게로 쏟아졌다. 여기저기서 낮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저것이 신전의 규율에 어긋나지 않는가……." "폐하께서 저리 말씀하시는데 누가 감히 입을 대겠나." 속삭임은 파도처럼 퍼졌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이서윤은 등줄기가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조아렸으나, 국왕의 다음 말이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강도현." 이헌이 강도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즐거워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서윤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어조 밑에 깔린 여유가, 마치 이미 결론을 다 정해놓고 그 과정을 즐기는 자의 것처럼 느껴져 불길했다. "명하십시오, 폐하." 강도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그 동작은 지나칠 정도로 매끄러웠고, 이서윤은 문득 그 매끄러움이 물뱀이 수면을 가르는 움직임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소리 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목표를 향해 미끄러지는 그런 움직임. "네가 오늘 성녀의 옆을 지킨 것을 보니, 짐이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헌은 계단 마지막 단에 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기사단장이라는 자리는 아직 미혼이라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지. 마침 성녀 역시 아직 정해진 배필이 없다고 들었는데." 홀 안이 다시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귀족 부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가에 얕은 미소를 그렸고, 늙은 대신 하나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서윤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받쳐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하는 불안이 스치는 순간, 이헌의 다음 말이 그 불안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두 사람의 혼약을 명하겠다. 왕실과 신전, 두 상징이 하나로 묶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니." 순간 이서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마치 얼굴에 얇은 석고를 덧씌운 것처럼, 그녀의 낯빛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강도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으나, 그는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 입가에는, 아주 미세하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이 마침내 손에 들어왔다는 듯한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문득 폐신전에서 처음 그와 마주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스름 속에서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지었던 그 눈빛. 그때도 그녀는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으나, 설마 그것이 이런 식으로 완성될 줄은 몰랐다. "성녀는 신전에 헌신한 몸입니다, 폐하." 이서윤이 목소리를 낮추어 항변했다. 그 목소리는 겉으로는 차분했으나, 그 밑에는 억누른 분노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그녀는 애써 감추었다. "혼약은 신전의 규율에 어긋납니다." "규율이야 짐이 손볼 수 있는 것이다." 이헌이 태연하게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으며, 그것은 이미 결론이 정해진 자의 여유였다. "이미 대신전과는 이야기를 마쳤으니, 너는 그저 명을 받으면 된다." "대신전과……." 이서윤이 되물었다.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갈라졌다. "언제부터 그런 이야기가 오갔단 말입니까." 이헌은 그 질문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듯, 옅은 웃음만을 지어 보였다. 그 침묵이 대답보다 더 명확한 통보였다. 이서윤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미 뒤가 다 정해진 통보였다. 그녀에게는 거부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은, 그저 형식적인 이의제기만 허락된 자리였을 뿐이었다. 주위의 귀족들은 저마다 숨을 죽인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그들의 눈빛 속에는 동정도, 놀람도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저 흥미로운 구경거리 하나가 생겼다는 정도의 얕은 관심만이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성녀님." 강도현이 낮게 그녀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방금까지의 정중함과는 다른, 어떤 확신에 찬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일, 조용히 받아들이시는 편이 서로에게 이롭습니다." 이서윤은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처음 폐신전에서 마주쳤을 때 보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갈증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그것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는 듯, 그 갈증이 조금씩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이서윤은 그가 처음부터 이 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었구나. 처음부터 노리고 있던 것이. "조건이라는 게……." 이서윤이 이를 악물며 물었다. "이거였습니까." 강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가의 미소를 조금 더 깊게 그렸을 뿐이었는데, 그 미소는 대답을 대신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확인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아 자신의 팔 위에 다시 얹으며, 홀 안의 모든 시선 앞에서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사람들에게는 다정함으로 보였을 테지만, 이서윤에게는 마치 사냥감을 완전히 손에 넣은 포식자의 여유처럼 느껴졌다. 이헌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짧게 웃었다. "좋은 그림이군. 오늘 밤의 가장 큰 소득이라 해도 좋겠어." 그의 말에 홀 안에서는 다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고, 몇몇은 축하의 말을 건네려는 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서윤은 그 모든 소리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것처럼, 오직 자신의 팔 위에 얹힌 강도현의 손의 무게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손을 뿌리칠 수도, 그렇다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채로, 홀 안의 침묵과 시선들 속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강도현의 손끝이 그녀의 팔을 아주 살짝, 마치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주어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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