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대연회 사흘 전, 이서윤은 자신의 처소에서 시녀들이 가져온 드레스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었다. 침대 위에 늘어놓인 옷감들이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을 받아 저마다의 색을 뽐내고 있었는데, 그 화려함이 오히려 그녀를 더 낯설게 만들었다. 신전에서 늘 입던 순백의 예복이 아니라, 처음으로 스스로 골라야 하는 옷이었다.
십육 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녀가 걸쳤던 옷은 늘 정해져 있었다. 성녀의 예복은 순백이어야 했고, 그 순백은 더러움을 모르는 존재라는 상징이었으며, 동시에 그녀 자신의 색이 지워진 흔적이기도 했다. 시녀들이 조심스레 권하는 것도 다르지 않았다.
"성녀님, 이 순백 드레스가 가장 격에 맞으실 듯합니다. 진주 장식이 은은하게 들어가 있어서……."
이서윤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손을 뻗어 다른 옷을 집어 들었다. 은사로 짜인 청록빛 드레스였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차갑고 매끄러워, 마치 물을 만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시녀들의 시선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성녀가 순백이 아닌 색을 고른다는 것 자체가, 이 궁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서윤의 눈에는 그 청록빛이 다른 무엇보다 익숙했다. 그것은 성녀다운 순백이 아니라, 그녀의 눈동자 색과 닮은 것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성녀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로 걸어들어가겠어.*
그 결심은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그 밑바닥에는 오랫동안 억눌려온 자존심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강도현이 무슨 조건을 내걸든, 적어도 이 하룻밤만큼은 자신이 만든 모습으로 서고 싶었다.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반항인지 알면서도, 그녀는 그 드레스를 옷장 앞에 조용히 걸어두었다.
시녀들이 머뭇거리며 다시 한번 순백 드레스를 권했을 때, 이서윤은 짧게 고개를 저었을 뿐,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설명한다 한들 저들이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결심이 아니었으니까.
연회가 시작되기 전, 거울 앞에 선 그녀는 낯선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다. 청록빛 드레스는 그녀의 마른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흘러내렸고, 은사로 짠 장식이 촛불 아래에서 잔물결처럼 흔들렸다. 순백의 예복을 입었을 때는 늘 인형처럼 느껴졌던 스스로가, 지금은 조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 낯섦이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인지 그녀 자신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연회장의 문이 열리자 수백 개의 촛불이 만들어내는 황금빛이 홀 안을 가득 채웠고, 그 빛 속에서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샹들리에에서 흘러내리는 빛이 대리석 바닥 위에 부서지며 반짝였고, 그 반짝임 사이로 수십 개의 눈동자가 화살처럼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성녀가 순백이 아닌 색을 입고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홀 안에는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는데, 그 웅성거림에는 놀라움보다 노골적인 비웃음이 더 짙게 섞여 있었다.
"저것 보게, 성녀라는 자가 저런 색을 입고……."
"체통도 없이."
"신전에서 뭘 가르친 건지, 원."
부채로 입가를 가린 부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소곤거렸고, 그 소곤거림은 마치 벌 떼가 웅웅거리는 소리처럼 낮게 홀 전체에 퍼져나갔다. 귓가에 흘러드는 조롱들은 뾰족한 바늘처럼 그녀의 살갗을 찔렀으나, 이서윤은 턱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십수 년간 훈련된 걸음걸이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히려 그녀를 지켜주는 갑옷이 되어주었다. 겉으로는 흔들림 없이, 안으로는 심장이 뒤틀리도록 뛰는 채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끝이 대리석 바닥에 닿을 때마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듯했고,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을 심판하는 발자국 소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시선을 어디에도 두지 않고, 홀 저편의 상단만을 응시한 채 걸었다.
*겁먹지 마. 저들의 웃음이 나를 무너뜨리게 두지 마.*
그때 그녀의 팔에 누군가의 손이 살짝 닿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촉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강도현이 서 있었다. 평소의 갑옷이 아닌 예복을 입은 그는, 낯선 만큼 더 위압적으로 보였다. 검은 예복의 어깨선이 그의 체격을 한층 더 강조했고, 늘 무표정하던 얼굴에는 오늘만큼은 얇은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그 미소가 오히려 서늘한 위압감을 더했다.
"이런 자리에서 홀로 걷는 건 좋은 그림이 아닙니다." 그가 낮게 말하며 그녀의 팔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팔에 걸었다. "제 옆에 서 계십시오. 그럼 저들의 입도 조금은 다물어질 겁니다."
이서윤은 그 손을 뿌리치고 싶었으나, 주변의 시선이 이미 두 사람을 향해 있었고, 여기서 밀어내는 것은 오히려 더 큰 구설을 만들 뿐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손끝에 닿는 예복의 감촉이 차갑고 단단해서, 마치 갑옷을 만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제게 조건을 내걸어 놓고, 이제는 은혜라도 베푸시는 겁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었다.
"글쎄요." 강도현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답했다. "성녀님의 편이 되어드리는 것도, 결국 제 조건의 일부니까요."
"조건의 일부라니, 참으로 편리한 말씀이시군요."
"편리하다면 그런 거겠지요." 그의 대답은 짧고도 태연했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정중했으나, 그 안에 배어 있는 여유로움은 어딘가 소유욕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서윤은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채, 다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을 향한 조롱의 시선들이 그의 등장으로 조금씩 방향을 잃는 것을 느꼈다. 방금까지 뒤에서 수군거리던 자들이 하나둘 시선을 거두고, 대신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흘깃거리며 다른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기사단장이 직접 팔을 내주었다는 사실이, 순식간에 귀족들의 태도를 바꾸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성녀님께 정중히 인사드립니다." 한 백작 부인이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드레스 색이 무척 인상적이시군요. 이런 색을 입으실 줄은 몰랐사온데, 역시 성녀님답게 남다른 안목을 지니셨습니다."
이서윤이 짧게 목례로 답하자, 백작 부인의 뒤를 이어 다른 귀부인이 다가왔다.
"기사단장님과 함께 계신 모습이 참으로 어울리십니다." 그 귀부인의 눈빛은 표면적으로는 감탄을 담고 있었으나, 그 속에는 은근한 호기심과 계산이 뒤섞여 있었다. "두 분이 이토록 가까우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방금까지 뒤에서 비웃던 자들이, 강도현의 존재 하나만으로 태도를 바꾸어 앞다투어 인사를 건네오는 광경을 지켜보며, 이서윤은 씁쓸한 우월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자신의 존재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옆에 선 남자의 그림자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자존심 어딘가를 미묘하게 긁어놓았다.
*내가 걸어들어가겠다고 했던 건,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애써 그 생각을 접었다. 지금 이 순간, 저들의 태도가 바뀐 것이 강도현 때문이든 아니든, 적어도 조롱의 화살은 방향을 잃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그 다독임 밑에는 여전히 씁쓸함이 가라앉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강도현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흘긋 살피는 듯했으나,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조금 더 단단히 감쌌을 뿐이었는데, 그 힘의 정도가 마치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은근히 드러내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감정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홀 저편에서 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며, 시종장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국왕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 순간 홀 안을 가득 채우던 웅성거림이 일순간 뚝 끊겼고, 모든 시선이 일제히 정문 쪽으로 쏠렸다. 이서윤은 강도현의 팔을 잡은 채로, 정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긴장으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