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밀주 들켰더니 혼약이라니

1화

왕궁 집무실은 늦은 밤인데도 촛불 수십 개가 밝혀져 있었고, 그 황금빛이 대리석 바닥에 길게 늘어져 마치 핏줄처럼 뻗어 있었다. 창밖에는 초여름 밤바람이 낮게 울며 지나갔지만, 방 안의 공기는 그와 상관없이 무겁게 고여 있었다. 촛불의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릴 만큼, 방 안에는 정적이 실체를 가진 것처럼 가득 채워져 있었다. 국왕 이헌은 팔걸이에 팔을 얹은 채 무릎을 꿇은 시녀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시선이 어찌나 차가운지 시녀는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시녀의 손끝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 손이 무릎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이헌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런 떨림을 좋아했다. 진실을 말하는 자의 떨림과 거짓을 감추려는 자의 떨림은 결이 다르다는 것을, 오랜 통치의 세월 동안 그는 몸으로 익혀왔다. "다시 말해봐라. 폐신전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이헌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그 낮음 안에 어떤 짓눌린 압력이 담겨 있어서, 시녀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손을 떨었다. 며칠 전, 왕궁 뒤편 폐신전에서 술병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는 봉인이 뜯긴 성유(聖油) 병까지 나왔다는 보고가 올라온 참이었다. 폐신전은 백 년 전 화재로 지붕이 무너진 뒤 방치된 곳이었으나, 그 안에 모셔진 성물만은 여전히 신성한 것으로 취급되어 아무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장소였다. 성물이 보관되는 장소에서 벌어진 음주는 단순한 규율 위반이 아니라 신성모독에 가까운 사안이었고, 그래서 국왕이 직접 이 심문을 주관하고 있는 것이었다. 방 한쪽에 서 있던 시종장은 감히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한 채 벽에 붙듯이 서 있었고, 창가에 선 시종 하나는 눈을 내리깐 채 촛대를 다시 정리하는 척하며 곁눈질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다들 이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누구도 먼저 입을 열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소, 소인은 그저 촛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다가갔을 뿐이옵니다." 시녀는 목소리를 짜내듯 이어갔다. "밤늦게 그곳에 불빛이 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싶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안에서 인기척이 나기에 문틈으로 살짝 엿보았는데……." "보았는데?" 이헌이 말을 자르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촛불이 그의 얼굴 반쪽에 그림자를 드리워 관자놀이 힘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 그림자는 마치 얼굴에 균열이 간 것처럼 보였고, 시녀는 그 압박에 짓눌린 듯 어깨를 움츠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성녀님이셨습니다. 성녀 이서윤 님께서, 홀로 술병을 손에 들고 계셨습니다. 초 하나만 켜놓으신 채로, 아무도 없이 혼자……."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실체를 가진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종들이 서로 눈치를 교환했으나 누구도 소리를 내지 못했고, 이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녀를 응시하기만 했다. 성녀. 왕국이 신의 은총을 증명하기 위해 내세운 상징이자, 대외적으로는 순결과 절제의 화신으로 알려진 존재가, 성물이 안치된 장소에서 밀주를 마시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봉인된 성유 병까지 뜯어놓고서. 이헌의 머릿속에는 여러 그림이 스쳐 지나갔다. 국경 지대의 백성들이 성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모으는 모습, 신전 회의에서 성녀의 순례를 두고 열띠게 논의하던 대신들의 얼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탱하는 얇은 유리 같은 명분이 지금 이 순간 산산조각 날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확실하냐." 이헌이 다시 물었다.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 목숨을 걸고 하는 증언이다. 만약 거짓이라면, 네 혀를 뽑아 성문 앞에 걸어둘 것이다." 시녀는 그 말에 몸을 흠칫 떨며 이마를 바닥에 거의 닿을 듯 숙였다. "확실하옵니다, 폐하. 성녀님의 얼굴을 잘못 볼 리가 없나이다. 십 년 넘게 신전에서 성녀님을 뵈어온 소인이옵니다. 그 얼굴을, 그 목소리를, 어찌 잘못 알겠나이까." 이헌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성녀의 추문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왕실의 위신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최근 국경 지대의 신앙심을 다잡기 위해 그녀를 앞세워 진행 중인 순례 행사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이 뻔했다. 백성들의 신뢰란 한번 무너지면 다시 쌓아 올리기가 몇 배는 힘든 것이었고, 지금의 왕국은 그런 여유를 부릴 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은밀하되 철저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라는 뜻이었다. "이 자리에 있던 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라." 이헌이 좌중을 향해 명했다. "오늘 이곳에서 들은 것은 이 방을 나서는 순간 잊어야 한다. 어긴 자는 그 목이 온전치 못할 것이다." 시종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 침묵의 깊이가 방 안의 온도를 한층 더 낮추는 듯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다가왔다. 갑옷을 입지 않은 평상복 차림이었으나 그 걸음걸이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발소리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마치 미끄러지듯 대리석 바닥을 밟아왔다. 기사단장 강도현이었다. "폐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강도현은 무릎을 꿇지 않고 가볍게 목례만 한 채 서 있었는데, 그 무례할 정도의 태연함이 국왕조차 굳이 지적하지 않을 만큼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왕실의 예법을 정확히 지키는 대신 최소한만 지키고, 그 나머지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채워 넣는 사내였다. 다른 신하들이라면 문책을 당했을 법한 태도였으나, 그의 검술과 판단력이 왕국의 방패 노릇을 해온 지 오래였기에 이헌도 굳이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폐신전 사건, 들었느냐." "방금 전 대략적인 얘기는 들었습니다." 강도현이 담담하게 답했다. "성녀님과 관련된 사안이라고요. 시녀 하나가 야밤에 폐신전 근처를 서성이다 보았다는 것도." 이헌은 그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표정에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으나, 그것이 도현의 평소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헌은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도현은 언제나 그러했다.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쓴 채로도, 궁정의 음모 속에서도, 그 얼굴에는 늘 잔잔한 물 같은 평정이 어려 있었다. "이 일을 네가 맡아라. 조용히, 그리고 철저하게." 이헌이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성녀의 위신에 흠이 가지 않도록 처리하되, 진실은 나만 알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그 시녀의 입도, 오늘 이 자리에 있던 자들의 입도 네가 단속해라." "명 받겠습니다." 강도현이 짧게 답하며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이 촛불 사이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는데, 문이 닫히기 직전 그의 입가에 스친 미소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미소는 아주 짧았고, 순식간에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기에 촛불조차 그 흔적을 붙잡지 못했다. 오직 그 자신만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회가 마침내 손안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발소리는 여전히 규칙적이었으나, 그 속도가 아주 조금, 평소보다 빨라져 있었다. 성녀 이서윤. 그 이름이 그의 머릿속에서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 왕국이 신성하다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이름을, 이제 그가 직접 손에 넣고 흔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드디어.' 그의 발걸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왕궁의 촛불들은 여전히 흔들리며 대리석 바닥에 핏빛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저편,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성녀 이서윤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위험을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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