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하, 바람은 곤란합니다

5화

서명을 확인한 순간,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은주가 왜 여기에. 종이 끝에 적힌 이름 세 글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혹시 잘못 봤을까 싶어서. 글씨체를 다시 확인하고, 도장까지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시녀장 은주의 서명이었다. 승인서 자체는 형식적인 절차였을 수도 있다. 시녀장이 왕실 물품 관리 서류에 서명하는 건 흔한 일이니까. 왕궁 살림을 관리하는 자리에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도장을 찍어야 하는 서류들이 쌓인다는 것쯤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필 이 서류였다. 청암 별궁 보수 예산, 소하와 관련된 그 서류에. 나는 서류를 다시 서랍에 넣고 손끝으로 책상을 몇 번 두드렸다. 마음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은주를 조용히 불러 물었다. 일부러 다른 시녀들을 물리고, 처소 안쪽 방에서 단둘이 마주 앉았다. "이 서류, 은주 님이 서명하신 게 맞나요?" 은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아주 짧았지만, 나는 확실히 봤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살짝 벌어지다가 다시 다물어지는 그 짧은 순간을. "…예. 물품 검수 담당으로 서명한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건 물품 검수가 아니라 예산 승인란인데요." 내가 서류를 펼쳐 그 칸을 손끝으로 짚으며 말하자, 은주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은주는 서둘러 서류를 챙겨 나갔다. 그 뒷모습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발걸음이 빨랐고,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문을 나서면서도 한 번쯤 뒤를 돌아볼 법한데, 그러지도 않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평소의 은주라면 웃으면서 "송구합니다, 왕비마님" 하고 넘어갈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웃지 않았다. 소영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비마님,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지." "은주 님은 우리한테 잘해주시는 분이잖아요. 저번에 제가 실수했을 때도 감싸주셨는데." "그래서 더 이상해." 친절한 사람일수록 뒤에 뭔가를 숨기고 있을 때 더 티가 나기 마련이다. 완벽하게 웃던 사람이 한순간 얼굴이 굳는다는 건,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은주는 처음부터 나에게 친절했다. 궁에 도착한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소홀히 대한 적이 없었다. 다른 시녀들이 은근히 눈치를 보고 거리를 둘 때도, 은주는 늘 먼저 다가와 필요한 걸 챙겨줬다. 그게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계산된 배려였을까. 그런데 그 친절함 뒤에, 청암 백작가와 연결된 무언가가 있는 걸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서명 하나로 사람을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니까. 세상에 착오라는 것도 분명 존재하고.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작은 균열이 생긴 건 분명했다. 그 균열은 아주 작았지만, 한번 생기고 나니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날 오후, 나는 태호 공작에게 따로 시간을 청했다. 별궁 예산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이유였지만, 진짜 목적은 은주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공작은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인 책상 너머로, 그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나를 바라봤다. "은주 시녀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태호 공작은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그냥, 이 궁의 사람들을 좀 더 알아가고 싶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전부가 아닐 뿐. 공작은 잠시 침묵하다가, 서류를 한 장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은주는 오래전부터 청암 백작가와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릴 때 그 댁에서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췄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왕궁 시녀장이 되셨네요."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폐하께서 직접 발탁하셨습니다." 도현이 직접. 청암 백작가와 인연이 있는 사람을. 우연일까, 아니면. 머릿속에서 여러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청암 백작가, 은주, 별궁, 그리고 도현. 그 모든 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태호 공작실을 나서며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궁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궁 안의 회랑을 걸으며 마주치는 시녀들, 관리들, 그 얼굴 하나하나가 전부 낯설게 느껴졌다.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 겉으로는 전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도현을 처소에서 기다렸다. 사흘째 오지 않던 그가, 그날은 웬일로 밤늦게 나를 찾아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도현이 평소처럼 여유로운 얼굴로 들어섰다. 옷자락에 밤바람 냄새가 묻어 있었다. "많이 기다렸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다가왔다. 며칠간 청암 별궁을 드나든 사람이, 태연하게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치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확신하는 듯이. "요즘 많이 바쁘셨나 봐요." "정무가 많았어."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답이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목소리에 흔들림도 없이. 나는 그 얼굴을 보며 문득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뭘 하고 다니는지 내가 전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알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청암 별궁 보수에 예산이 많이 쓰였다고 들었어요."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순간 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것도 놓치지 않았다. 은주가 그랬던 것처럼, 도현도 그 짧은 균열을 숨기지 못했다. "그건… 오래된 건물이라 손볼 곳이 많아서." "그렇군요."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확실한 증거도 없고, 정면으로 부딪히기엔 너무 이른 시점이었다. 패를 다 보이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 도현은 내 옆에 앉아 몇 마디를 더 나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궁 안의 소소한 소문들. 나는 웃으며 맞장구를 쳤지만, 속으로는 그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간 뒤, 나는 창가에 앉아 오래 생각했다. 창밖으로 달빛이 희미하게 비쳤고, 궁 안은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은주의 서명, 소하의 별궁, 도현의 거짓말 같은 변명. 그리고 재하의 노골적인 적의. 이 궁 안에서, 누가 진짜 내 편이고 누가 나를 이용하고 있는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 무엇보다 나를 불안하게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생각은 더 복잡하게 엉켰고, 결국 나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소영이 급하게 처소로 뛰어들어왔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왕비마님, 큰일 났어요. 청암 백작가에서 사람이 왔는데… 임소하 님이 회임하셨다고 합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