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하, 바람은 곤란합니다

3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은주가 방으로 들어왔다. 얼굴에는 이미 오늘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왕비마님, 오늘부터는 하루 일과를 익히셔야 합니다." "네, 그래야죠." 말은 순순히 했지만 속으로는 한숨부터 나왔다. 왕비라는 자리가 이렇게 스케줄이 빡빡할 줄 누가 알았나. 나는 원래 아침잠도 많은 사람인데. 은주는 조회 시간부터 시작해 시녀들 관리, 후원 관리, 그리고 궁 내 여러 가문 부인들과의 접견까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했다. 듣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걸 다 외워야 한다고? "오늘 오후에는 청암 백작가에서 방문이 있을 예정입니다." "청암 백작가요?" 이름은 낯설었다. 나는 찻잔을 만지며 되물었다. "예. 그 댁 따님이 폐하의 측실로 계십니다." 측실. 나는 그 단어를 들으며 잠시 멈췄다. 손끝이 찻잔 표면에서 미끄러졌다. 이미 있었나. 결혼식 전부터? 아니면 그 후에?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이 돌아갔지만, 답이 나오기도 전에 은주가 말을 이었다. "임소하 님입니다. 폐하와는 물론, 도현 님과도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결혼 전부터라니. 그럼 나보다 훨씬 먼저 자리 잡은 사람이라는 뜻인가.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얼굴에 티 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건 이미 몸으로 배운 교훈이었다. "그래요. 그럼 예를 갖춰야겠네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벌써 전략을 짜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밀리는 모습 보이면 앞으로 계속 밀린다. 그건 절대 안 된다. 오후, 소하가 처소를 찾아왔다. 예상보다 훨씬 화려한 차림이었다. 붉은 머리는 정교하게 틀어 올렸고, 짙은 눈매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걸음걸이 하나에도 여유가 배어 있었다. 이 궁에서 오래 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여유.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현 님." 소하는 먼저 도현에게 가볍게 예를 갖춘 뒤, 내게 시선을 돌렸다. "왕비마님을 뵙습니다." 말은 공손했지만, 시선은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내렸다. 뭐 감정 상하는 시선이네. 옷차림부터 표정까지 값 매기는 눈빛이었다. "어서 오세요.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은 소하가 찻잔을 들며 웃었다. 웃는 모습마저 계산된 것처럼 보였다. "먼 곳에서 오셔서 낯설겠어요. 궁 생활이 쉽지 않으실 텐데."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괜찮습니다." "그래도 폐하께서는 워낙 바쁘신 분이라, 왕비마님을 자주 찾으시기 어려울 거예요. 제가 옆에서 오래 지켜본 바로는요." 이건 은근한 경고인가, 아니면 그냥 자랑인가. 둘 다일 수도 있겠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런가요. 소하 님이 오래 곁에 계셨다니, 폐하의 성격을 잘 아시겠네요." "물론이죠." 소하의 눈이 살짝 빛났다. 그 정도 자랑거리는 얼마든지 풀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앞으로 자주 조언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아직 폐하에 대해 아는 게 적어서요." 소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뭐, 순순히 밀리는 척은 안 해줄 거니까. 이쪽에서 먼저 손 내미는 척하면 저쪽도 함부로 못 나온다. "…네, 그러시죠."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아까보다 한층 차가워졌다. 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모르는 척 찻잔을 다시 들었다. 이후로도 몇 마디 더 오갔지만 딱히 기억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날씨 이야기, 궁 안 꽃 이야기, 그런 겉치레들. 서로 속을 안 보이려고 애쓰는 대화였다. 결국 별 소득 없이 자리는 끝났다. 소하가 나가고 나서, 소영이 문을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 눈빛 보셨어요? 완전 왕비마님 견제하는 눈빛이던데." "봤어." "근데 왜 그렇게 웃으면서 응대하셨어요?" "밀리는 거 보여주면 더 기어오를 것 같아서." 소영이 픽 웃었다. "왕비마님도 보통 아니시네요." "이 정도는 기본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등에는 땀이 살짝 배어 있었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했어도 속은 하나도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어. 여기서 밀리면 앞으로 계속 밀릴 텐데. 그날 저녁, 나는 궁 안 정원을 산책하다 재하와 마주쳤다. 바람이 살짝 차가워서 걸음을 빨리하던 참이었다. 그는 서류 뭉치를 들고 걷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윤재하 님." 부르니 겨우 멈춰 섰다. 표정에는 조금의 반가움도 없었다. "예." "인사도 없이 지나가시네요." "바쁩니다." 짧고 건조한 대답. 정말 볼 때마다 예의라는 걸 모르는 사람 같았다. 서류를 든 손이 조금 삐뚤어져 있는 걸 보니 진짜 바쁘긴 한가 보다. "태호 공작님의 아들이시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아버님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시네요." "그런 말씀은 삼가주십시오." 그가 처음으로 표정을 굳혔다. 뭔가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 반응이 오히려 흥미로웠다. 아버지 이야기가 약점인가.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드릴게요. 다만 왕비로서, 궁 안 사람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요." "저는 왕비마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 없습니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나온 그 말에, 나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솔직할 필요가 있나. "그렇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니 오히려 편하네요." 재하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냥 지나쳐 갔다. 뒷모습을 보며 나는 팔짱을 꼈다. 대체 뭐가 저렇게 못마땅한 거지. 내가 뭘 어쨌다고.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벽을 치나. 소영이 뒤늦게 뛰어와서 그 장면을 봤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사람 원래 저래요?" "그런가 봐." "근데 이상하게, 저 사람은 그냥 싸가지가 없는 거고, 소하 님은 뭔가 더… 위험한 느낌이었어요." 소영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재하는 노골적인 적대였고, 소하는 웃는 얼굴 뒤에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둘 다 편은 아니었지만, 위협의 종류가 달랐다. 하나는 정면에서 오는 칼이고, 하나는 등 뒤에서 오는 바늘 같았다. "어느 쪽이 더 무서워요?" 소영이 물었다. "글쎄. 정면에서 오는 건 막을 수 있는데, 뒤에서 오는 건 언제 찔릴지 모르니까." 내 대답에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소하 님을 더 조심해야겠네요." "둘 다 조심해야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에는 다른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날 밤, 도현은 오지 않았다. 이유도 전해지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바쁜가 보다 했다. 새로 온 왕비를 챙길 시간이 어디 있겠나 싶기도 했고. 그런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는 나를 찾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나는 밤늦게까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려 해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원래 남편이라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이 갈 이유는 없는데. 그렇게 사흘이 지난 밤, 은주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왕비마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의 차분한 은주와는 달랐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고, 목소리는 낮게 떨렸다. 나는 창가에서 몸을 돌려 은주를 마주 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은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꺼내기 전에 주변을 살피는 듯한 그 몸짓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짧은 침묵이, 앞으로 벌어질 일이 절대 가벼운 일은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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