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국경의 마지막 관문 앞에서 마차가 멈췄다.
청하국의 영토는 여기서 끝이었다. 이 관문을 넘으면 대현제국의 땅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국경 표지석이 유난히 낡아 보였다. 저 돌덩이 하나를 기준으로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거구나.
'실감이 안 나네.'
강태민이 말에서 내려 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강일도 공작가의 적남이자 청하국의 기사인 그는, 열두 살 때부터 나와 함께 자란 친구였다. 어릴 적엔 매일같이 검술 훈련장 앞에서 죽치고 앉아 그가 훈련받는 걸 구경했었다. 그때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여기까지밖에 배웅할 수 없어서 미안합니다."
존댓말이었다. 어릴 때는 편하게 말을 놓던 사이였는데, 언제부턴가 그는 나에게 격식을 차렸다. 아마도 내가 왕녀라는 사실을, 그리고 곧 태자비가 된다는 사실을 그가 더 무겁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거였다.
'그냥 예전처럼 말 놓으라고 하면 될까.'
말이 안 나왔다. 나도 안다. 이제 우리 사이엔 예전처럼 편할 수 없는 벽이 생겼다는 걸.
"괜찮아. 여기까지도 고마워."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결혼식에서 있었던 일…… 소문이 벌써 다 퍼졌습니다."
마른침이 삼켜졌다.
'벌써?'
열흘도 안 됐는데. 발이 없어도 소문은 나보다 빠른가 보다.
"그날 그 서신, 대현제국 쪽에서 실수로 새어나온 게 아니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무슨 뜻이야."
"누군가 일부러 흘렸을 수도 있다는 거죠."
나는 마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국경 너머로 낯선 땅이 펼쳐져 있었다. 산세부터 다르게 느껴졌다. 청하국의 완만한 능선과는 달리 대현제국 쪽 산은 날카롭고 삭막했다.
'일부러 흘렸다면, 왜.'
생각이 복잡하게 엉켰다. 만약 이 폭로가 의도된 거라면, 그건 결국 나를, 아니 이 결혼 자체를 흔들려는 누군가의 계산이었다는 뜻이었다.
누가 그런 짓을 할까. 대전에서 그 서신을 읽던 관리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 담담한 어조가 오히려 소름이었다.
강태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왕녀님. 저는 앞으로도 재현 왕세자님을 도울 겁니다. 청하국이 대현제국에 흔들리지 않도록."
그 말에 나는 그를 바라봤다. 태민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저 눈빛.'
열두 살 때부터 봐 온 그 곧은 눈빛이었다. 뭘 하든 뒤돌아보지 않을 것 같은.
"고마워, 태민아."
오랜만에 놓은 말이었다. 존댓말을 걷어낸 그 한마디에, 그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당황했나. 아니면 그리웠나.
"몸 조심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연락 주세요."
"그럴 방법이 있을까."
국경을 넘으면 나는 완전히 다른 나라의 사람이 되는 거였다. 편지 한 장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을 거고, 설령 보낸다 해도 검열을 피할 방법이 없을 거였다.
"찾을 겁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가 느껴졌다.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래도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어쩌면 나는 저 말을 믿고 싶어서 여기까지 버틴 걸지도 몰랐다.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나는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고, 태민은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산모퉁이에 가려 완전히 사라졌다.
옆자리에 앉은 하나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저는 끝까지 왕녀님 곁에 있을 거예요."
그 말에 나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그래도 하나는 있으니까.'
말이 씨가 되길 바랄 뿐이었다.
대현제국의 황도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열흘 뒤였다.
열흘 동안 마차 안에서 흔들리며 별생각을 다 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눈이 떠졌고, 그때마다 창밖 풍경이 조금씩 낯설어지는 걸 확인했다. 국경을 넘은 순간부터 언어도, 건물의 양식도, 사람들의 옷차림도 조금씩 달라졌다.
청하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궁궐이 눈앞에 펼쳐졌다. 화려함과 위압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곳이었다.
성벽 하나가 청하국 왕궁 전체보다 높았다. 그 위에 새겨진 문양들도 하나같이 사납고 화려했다.
'와, 진짜 크네.'
이런 순간에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좀 어이없었지만, 그 규모에 압도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환영식은 형식적이었다. 대현제국의 대신들은 예의를 갖췄지만, 그 눈빛에는 호기심과 은근한 무시가 섞여 있었다.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그들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누가 봐도 뒷말을 참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청하국에서 온 그 왕녀, 태자가 원한 게 아니라던데.'
그런 눈빛들이었다.
한 명씩 지나갈 때마다 그 시선이 내 얼굴에서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값을 매기는 듯한 시선. 마치 상품을 감정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시선들을 견디며 궁 안으로 들어섰다. 걸음마다 대리석 바닥에 내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지만, 표정은 최대한 무너지지 않게 붙잡았다.
그리고 처소에 도착해서야, 나를 안내한 시종이 흘리듯 던진 말을 들었다.
"이 처소는 원래 다른 분을 위해 준비된 곳이었습니다만."
"……다른 분?"
시종은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영 언니를 위해 준비된 처소였겠지.'
시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실수로 뱉은 말이라는 게 뻔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지의 색부터 가구의 배치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화려했다. 마치 절세의 미녀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된 것처럼.
침대 머리맡에 놓인 장식용 화병조차 손이 많이 간 세공품이었다. 커튼의 자수 하나하나까지 정성이 들어가 있었다. 이건 그냥 대충 준비한 방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특정한 사람을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된 방이었다.
'그럼 나는 뭔데. 대체품인가.'
그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날 대전에서 들었던 그 한마디가, 이제는 확신이 되어 나를 짓눌렀다.
이현이 원한 사람은 처음부터 언니였다. 나는 그저, 뭔가 사정이 생겨 대체된 존재였을 뿐이었다.
십 년. 그 십 년 동안 나는 뭘 했나. 그 사람 한 명 보겠다고, 그 사람 웃는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나.
'십 년을 뭐 하러 그렇게 좋아했나, 나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자조인지 헛웃음인지 구분도 안 되는 웃음이. 그런데 그 순간, 하나가 창백한 얼굴로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왕녀님, 방금 시녀들 사이에서 이상한 얘기를 들었어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하나는 원래 이런 일에 침착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손끝까지 떨고 있었다.
"뭘."
"이번 혼사가…… 오빠 왕세자님을 견제하기 위한 거라는 말이 있어요."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견제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머릿속이 하얘졌다. 방금까지 십 년의 세월이 헛것이었다는 것만으로도 벅찼는데, 이젠 이 결혼 자체가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서신 사건도, 이 화려한 처소도, 전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거였다.
'대체 이 결혼, 진짜 이유가 뭐야.'
하나의 손을 마주 잡은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