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결혼식을 사흘 앞두고, 나는 어머니가 남긴 서첩을 다시 꺼내 읽었다.
낡은 표지는 손을 댈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오 년이 넘었는데도, 그 책만 펼치면 아직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왕비였던 어머니는 살아계실 적 늘 이런 말을 했다.
'정치는 감정을 믿는 순간 진다. 신뢰는 계산 위에 세워지는 것이지, 계산 없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할 때마다 표정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감정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애초에 감정이라는 걸 셈에 넣지 않는 사람 같았다.
그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가 십 년째 한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좀 우스운 일이었다.
'너네 엄마가 저 말 알면 뒤집어질 텐데.'
서첩을 덮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궁의 정원 너머로 붉은 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사흘 뒤면 저 등불이 결혼식장을 가득 채울 것이다. 십 년 전 그날처럼.
열두 살, 청하국을 방문한 대현제국 사신단 속에서 나는 이현을 처음 보았다.
그날 그는 사신단 대표 뒤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또래보다 키가 크고, 표정이 없어서 오히려 눈에 띄었다.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지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을 텐데, 그는 그 긴 환영 절차를 마치 아무 감각도 없는 사람처럼 서서 견뎌냈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렇게 가만히 있지.'
환영 연회가 끝나갈 무렵, 나는 실수로 그의 발을 밟았다. 급하게 시녀를 뒤따라가다가 방향을 잘못 잡은 탓이었다. 발을 밟은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대현제국 태자의 발을 밟았으니, 이건 국가적 사고가 아닌가.
당황해서 사과하려는데, 그가 먼저 웃었다.
"괜찮습니다, 왕녀님."
짧은 웃음이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왜 그렇게 오래 남았을까.
'그냥 예의였던 거겠지.'
그때는 그 웃음 하나가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이후 십 년, 나는 그 웃음을 근거로 온갖 서신에 다정함을 덧입혔다. 정략적인 안부에서 배려를 찾고, 형식적인 문장에서 마음을 읽었다. 그가 보낸 편지에 '건강을 살피시길 바랍니다' 한 줄이 적혀 있으면, 나는 그 한 줄을 사흘 밤낮 곱씹으며 온갖 의미를 붙였다. 그가 정말로 내 건강을 걱정했을까, 아니면 그저 형식적인 인사였을까. 답이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언제나 좋은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날 정원에서 본 그 짧은 시선이, 자꾸만 그 십 년을 흔들었다.
이현의 눈이 아영에게 잠깐 머물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십 년 동안 그의 눈빛을 관찰하며 살아온 사람만이 알아챌 수 있는 미세한 차이였다.
'설마.'
아니, 아니야.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런데 왜 자꾸 그 장면이 눈앞에서 재생되는 걸까.
결혼식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대현제국에서 보내온 예물이 궁 안을 가득 채웠고, 하나는 그 화려함에 눈을 못 떼며 좋아했다.
"왕녀님, 이 목걸이 좀 보세요. 이런 건 처음 봐요."
하나가 상자를 열어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붉은 보석이 촛불을 받아 반짝였다. 대현제국 왕실 세공사가 만들었다는데, 세공이 어찌나 정교한지 보석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는 내 유모의 딸이자 젖동생이었다. 나보다 두 살 어렸고, 태어날 때부터 나와 함께 자란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는 늘 나보다 먼저 기뻐하고, 나보다 먼저 걱정했다. 궁 안에서 내 진짜 얼굴을 아는 사람은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쁘긴 하네."
나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마음이 딴 데 가 있으니 목걸이 하나에 감동할 여유가 없었다.
"왕녀님, 무슨 걱정 있으세요?"
하나가 눈치 빠르게 물었다. 손에 든 목걸이를 다시 상자에 넣으며, 그녀는 이미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낸 얼굴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정원에서의 일을 짧게 얘기했다. 이현의 시선이 아영에게 잠깐 스쳤던 것, 시녀들의 이상한 수다.
"별거 아닐 수도 있어. 그냥 내가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힘이 없었다.
하나는 표정이 굳었다.
"그런 게 있었어요? 저도 며칠 전에 좀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뭘?"
내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높아졌다. 하나는 잠깐 망설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태자님 시종 하나가, 아영 왕녀님 초상화를 보고 감탄했다는 얘기가 있어서요. 그냥 흘러가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초상화라니.'
혼담이 진행될 때, 대현제국 쪽에 청하국 왕녀들의 초상화가 전해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형식적인 절차였다. 나와 아영, 그리고 셋째인 은서까지 세 왕녀의 초상화가 함께 보내졌고, 그중에서 나이와 위치를 따져 내가 태자비로 정해졌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아영의 초상화가 유독 화제가 됐을까.
"그게 언제 얘기야?"
"한 열흘쯤 됐을걸요. 시종들끼리 하는 얘기라 저도 우연히 들은 거라……."
"그 시종, 이름 아니?"
"거기까진 몰라요. 근데 왕녀님, 그거 그냥 그림이 예뻐서 그런 거 아닐까요? 언니 초상화는 원래도 유명했잖아요. 궁 밖에서도 청하국 제일미라고 하고."
하나가 서둘러 덧붙이는 말이었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게 뻔히 보였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아영은 절세의 미녀였다. 누구든 감탄할 만했다. 그게 자연스러운 반응 아닌가. 초상화 한 장 보고 감탄하는 것과, 실제로 마음이 기우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나는 그렇게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러게 좀 예쁘게 태어나지, 나도.'
자조적인 생각이 스치자 나는 피식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웠다. 십 년을 기다린 사람의 눈빛 하나에 이렇게 흔들리는 것도 우습고, 그 흔들림 속에서도 언니의 외모를 탓하는 내 속내도 우습고.
하나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괜히 목걸이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왕녀님, 그래도 이틀만 지나면 다 끝날 일이잖아요. 결혼식 끝나면 태자님도 왕녀님만 보게 되실 거예요."
"그래야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의 서재를 지나다가 문틈으로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대현제국 사신단의 대표였다. 목소리가 나이 들고 노회한 느낌이었다.
"국왕 폐하, 이번 혼사는 두 나라 모두에 이득이 될 것입니다. 태자께서도 매우 기뻐하고 계십니다."
"그래, 다행이오. 우리로서도 급한 일이었으니."
급한 일. 그 표현이 이상하게 걸렸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데요, 아버님.'
혼담이 반년 전에 갑자기 진행된 것부터, 아버지가 유독 서두른 것까지. 무언가 뒤에 숨겨진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청하국이 대현제국에 뭔가 급하게 매달릴 이유가 있었던가. 국경 문제도 없었고, 재정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이 혼사를 유독 서둘렀다.
나는 문 앞에 멈춰 서서 더 듣고 싶었지만, 발소리를 들은 시종이 다가오는 바람에 자리를 떠야 했다. 복도를 걸어 나오는 내내 등 뒤가 서늘했다. 방금 들은 두 마디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창가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몇 개 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틀 남았다.'
십 년을 기다린 결혼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는데, 마음은 기대보다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녀들의 수다도, 하나의 위로도, 아버지의 알 수 없는 대화도, 전부 하나로 이어지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야, 그냥 신경과민인 거야.'
나는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박힌 가시는 빠지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아영의 방 앞을 지나다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았다.
원래는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안에서 언니가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들려서,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건 안 될 일이라니까요."
언니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초조함이 배어 있었다. 아영은 평소 어떤 상황에서도 목소리 하나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저렇게 다급한 목소리를 낸다는 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대화를 더 듣기 위해 숨을 죽이고 다가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문 안쪽에서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안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