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 한마디가 대전 안에 퍼진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향로에서 타오르던 향 연기가 허공에 멈춰 선 것처럼 보였다.
하객들의 시선이 이현에게서 나에게로, 다시 언니 아영에게로 옮겨갔다. 아영은 하객석 맨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입술까지 새하얗게 변한 걸 보니, 저건 놀란 게 아니라 확인된 두려움이었다.
'이거…… 진짜였구나.'
마른침이 삼켜지지 않았다. 목구멍이 바싹 말라 있었다. 몇 번이나 삼키려 해도 침이 넘어가질 않았다.
대신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부채로 입을 가리는 이도 있었고, 옆 사람과 눈빛만 주고받으며 아무 말도 못 하는 이도 있었다. 대현제국 사신단 대표가 다급히 이현에게 다가가 뭔가를 속삭였다. 그 짧은 순간, 대전 안의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이현의 얼굴에는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가, 곧 익숙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전환이 너무 빨랐다.
'저 사람, 원래도 저렇게 빨리 표정을 바꾸는 사람이었나.'
십 년 동안 서신 속에서 본 이현은 늘 다정하고 신중했다. 글씨체마저 조심스러웠고, 문장 하나에도 몇 번이나 고쳐 쓴 흔적이 남아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은, 방금 벌어진 실수를 순식간에 수습하려는 계산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십 년치의 편지와 지금 이 표정 중 어느 쪽이 진짜인지, 나는 도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어느 쪽도 진짜가 아닐 수도 있지.'
아버지 윤정후가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대전 바닥을 긁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태자, 방금 그 말은 무슨 뜻이오."
목소리에 노기가 섞였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도 함께 있었다. 나는 그 두려움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이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저건 화가 나서 쥐는 손이 아니었다. 뭔가를 숨기려는 사람의 손이었다.
'아버지도 뭔가 알고 있었어.'
확신이 들었다. 이 결혼이 급하게 진행된 이유, 아버지가 유독 서두른 이유. 처음 혼담이 나왔을 때부터 이상하게 빨랐다. 보통이라면 몇 달, 아니 몇 년씩 걸릴 절차가 반년도 안 돼 끝났다. 그때는 그냥 대현제국이 다급했나 보다 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뭔가 뒤에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현이 대전 중앙으로 나섰다. 걸음걸이가 흔들림 없이 곧았다. 그리고 하객들을 향해,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의 발언은 제 시종의 착오입니다.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착오라니.
'개소리하고 있네.'
나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방금 들은 말이 착오일 리 없었다. 목소리도, 표정도, 너무나 진심 같았으니까. 착오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 말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밝힐 사람은 없었다. 대현제국 사신단은 이미 입을 다물었고, 청하국의 대신들은 감히 태자의 말을 반박할 배짱이 없었다. 다들 그저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이 어색한 침묵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얼굴들이었다.
대전 안의 분위기가 다시 억지로 봉합되기 시작했다. 누군가 작게 헛기침을 했고, 누군가는 부채를 다시 접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현은 다시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인 왕녀, 계속하시겠습니까."
그 질문이 너무나 태연해서,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지금 나한테 그걸 묻는 거야?'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봤으면서, 그걸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되돌리고, 이제 나한테 선택권이라도 주는 척을 하고 있었다. 저 여유, 저 침착함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대전 안의 수백 개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아버지는 두려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언니는 여전히 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고개가 유독 낮았다. 마치 내 눈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는 것처럼.
만약 여기서 내가 멈추면, 두 나라 사이의 혼사가 파기되는 거였다.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청하국은 대현제국에 비하면 작은 나라였고, 이런 식으로 결혼이 깨지면 외교적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 없었다. 국경을 맞댄 작은 나라가 대국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결과가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 나는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들어왔다.
그리고 오빠 윤재현.
왕세자인 오빠는 이 결혼을 통해 대현제국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 했다. 몇 달 전 오빠가 밤늦게 서재에 불을 켜 두고 지도를 들여다보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정무가 많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멈춘다면, 오빠가 감당해야 할 부담이 얼마나 커질지 뻔했다.
'……씨발.'
속으로 거칠게 욕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계산을 해야 하는 내 처지가 참혹했다. 이게 결혼식인지, 무슨 조약 체결식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나는 숨을 짧게 내쉬고, 이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계속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는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이현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쳤다. 안도인지, 만족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미소였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저 미소, 나중에 꼭 기억해 둔다.'
예식은 다시 이어졌다. 반지가 교환되고, 서약이 마무리됐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유난히 차가웠다. 하객들의 축하가 이어졌지만, 그 목소리들은 하나도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다. 다들 그저 절차를 마치듯 박수를 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예식이 끝난 뒤, 나는 잠깐 언니와 눈을 마주쳤다.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에는 미안함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안도.
분명히 안도였다.
'언니도 알고 있었던 거야, 처음부터.'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나는 이 결혼이 시작부터 얼마나 뒤틀려 있었는지 완전히 깨달았다. 아버지도, 언니도, 어쩌면 오빠까지도 이미 알고 있었던 무언가를, 나만 모른 채 이 자리에 서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사흘 뒤, 나는 대현제국으로 떠나는 마차에 올랐다.
짐을 실은 마차가 다섯 대. 그중 한 대에 내가 탔다. 창밖으로 청하국의 궁성이 점점 멀어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국경까지 배웅하러 나온 강태민의 얼굴이, 그날 유독 어두웠던 걸 나는 잊지 못한다. 평소라면 웃으며 손이라도 흔들었을 사람이, 그날은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