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문이 열리고,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아영의 얼굴에 순간 당황이 스쳤다가 곧 태연함으로 바뀌었다. 방 안에는 언니의 유모가 서 있었다. 늙은 유모는 손에 뭔가를 쥐고 있다가 얼른 소매 속으로 감췄다.
'저건 또 뭔데.'
"서인아, 여기서 뭐 하니."
"그냥 지나가다가요."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언니의 눈빛은 뭔가를 숨기는 사람의 것이었다.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고, 손끝이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저 표정, 낯설지 않은데.'
어릴 때부터 언니는 늘 완벽했다. 아름다움도, 처신도, 마음가림도. 궁 안의 모두가 아영을 보며 감탄했고, 나는 그 옆에서 늘 조용히 서 있는 쪽이었다. 그런 언니가 저렇게 초조한 얼굴을 보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십 년 넘게 봐온 얼굴인데도 저런 표정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결혼식 준비로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그래."
언니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은 평소보다 얕았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저거 봐. 눈이 안 웃잖아.'
나는 더 캐묻지 않고 방으로 돌아왔다. 캐물어봤자 언니가 순순히 말해줄 리 없었다. 십 년을 함께 자란 자매지만, 언니와 나 사이에는 늘 미묘한 거리가 있었다. 어머니가 같아도, 위치가 달랐으니까. 아영은 맏딸이었고, 나는… 뭐,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위치였다.
방문을 닫고 나서야 등에 식은땀이 배어 있는 걸 깨달았다.
'별거 아니겠지. 별거 아닐 거야.'
그렇게 되뇌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자꾸 그 유모의 소매 속으로 사라진 무언가에 붙들려 있었다.
결혼식 날이 밝았다.
청하국 왕궁의 대전 앞뜰은 새벽부터 사람들로 가득 찼다. 대현제국에서 온 사신단과 청하국의 대신들, 각국의 축하 사절들까지. 마당을 가득 채운 깃발과 붉은 융단, 그 위로 향 연기가 낮게 깔렸다. 하나는 새벽부터 나를 단장시키며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왕녀님, 오늘 정말 예쁘세요."
"입 발린 소리 그만하고 머리 좀 마저 해줘."
"진짠데요!"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봤다. 화려한 예복과 장신구로 꾸며진 모습은 낯설었다. 평범한 외모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이렇게까지 꾸며놓으니 스스로도 어색했다. 목덜미를 두른 금빛 장신구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십 년을 기다린 날인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하나가 마지막으로 머리에 비녀를 꽂아주는 동안, 나는 손끝으로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긴장해서 그런 거야. 그냥 긴장.'
예식이 시작되기 전, 나는 잠깐 정전 뒤편에서 숨을 돌렸다. 사람들 눈을 피해 기둥 뒤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현제국 사신단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태자께서는 정말 아영 왕녀님을 마음에 두셨던 거 아닙니까?"
"쉿, 그 얘기는 여기서 하는 게 아니지."
"아니, 초상화를 처음 보셨을 때 표정이 워낙 유명했어서요. 궁 안에서 다들 알던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왜 서인 왕녀 쪽으로 정해진 겁니까?"
"그건……."
뒤이은 말은 낮아져 들리지 않았지만, 이미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숨이 턱 막혔다.
'뭐라고.'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조각들이 순식간에 맞춰졌다. 이현의 짧은 시선, 초상화 이야기, 아버지의 급함, 언니의 초조함, 유모가 소매 속에 감춘 무언가. 모든 게 하나로 이어졌다.
'그럼 나는……'
그럼 나는 처음부터 이현이 원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벽을 짚고 겨우 몸을 지탱했다. 기둥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졌다. 하나가 다급히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왕녀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새하얗게 되셨어요."
"…괜찮아."
나는 억지로 웃었다. 이 상황에서 무너지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아직 확실한 게 아니었다. 그저 스쳐 들은 말일 뿐이었다.
'제발 그냥 뜬소문이길.'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뜬소문이 아니었다.
하나가 물을 가져다줬다. 나는 그걸 받아 마시면서도 눈은 계속 사신단이 서 있던 자리를 향했다. 그들은 이미 자리를 옮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십 년 전부터 정해진 혼사라고 했잖아. 그게 다 뭐였는데.'
속으로 아무리 되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옷매를 다시 가다듬고 억지로 등을 곧게 폈다. 지금 무너지면 오늘 하루는 완전히 망가진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예식이 시작됐다.
대전 안에 이현이 먼저 들어섰다. 정갈한 예복을 입은 그는 여전히 서늘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객들의 감탄사가 낮게 퍼졌다. 곳곳에서 소곤거리는 소리,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 여인들, 술 냄새를 풍기며 벌써부터 얼굴이 붉은 대신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앞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붉은 융단 위로 발을 옮길 때마다 심장이 쿵, 쿵 울렸다.
'그냥 걸으면 돼. 그냥 걸으면 돼.'
이현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늘 봐왔던 그 다정한 미소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미소가 다르게 보였다.
'저 미소도 계산된 걸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게 됐다. 서늘하고 깊은 눈이었다. 저 눈이 아영을 향해 있었다고? 나는 그 상상만으로도 목구멍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예식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서약을 나누는 순서까지, 모든 게 매끄러웠다. 사제가 읊는 축문 소리가 대전 안에 낮게 울렸다. 나는 이현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손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긴장한 건가, 아니면 원래 이런 건가.'
그런데 서약이 끝나고 반지를 교환하려는 순간, 대전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멈추십시오!"
다급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대현제국 사신단 중 하나가 창백한 얼굴로 뛰어들어왔다. 숨이 턱까지 찬 듯 어깨가 크게 들썩였고, 손에 든 서신은 이미 반쯤 구겨져 있었다.
"태자 전하, 서신이……!"
대전 안에 있던 대신들이 낮게 술렁였다. 아버지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저 멀리서 아영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언니 얼굴이 왜 저래.'
그가 내민 서신을 이현이 받아 펼쳤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대전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촛불 흔들리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정적이었다.
'뭔데, 뭔데 저래.'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끼며 그 서신의 내용을 짐작해보려 애썼다. 손끝이 저절로 이현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가, 다시 슬그머니 놓았다. 그런데 이현이 서신을 접으며 낮게 중얼거린 말이, 정확히 내 귀에 꽂혔다.
"…아영 왕녀가 아니라니."
대전 안의 모든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
숨죽인 침묵 속에서,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멀리서 아영이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