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은 영애는 숨어 산다

5화

대강당은 화려했다. 샹들리에가 눈이 부시게 빛났고, 벽마다 걸린 태피스트리는 금실로 짜여져 있었다. 돈 지랄 보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최대한 벽에 붙어 섰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만 봐도 이 저택 한 층을 새로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게 다 유리알인지 진짜 보석인지 구분도 안 됐다. 아마 후자겠지. 이 동네 귀족들은 그런 걸로 급을 나눈다고 들었으니까. 바닥엔 새하얀 대리석이 깔려 있었는데, 어찌나 반짝이는지 내 얼굴이 다 비칠 지경이었다. 저기에 넘어지면 뇌진탕이 아니라 전신 골절일 것 같아서, 나는 걸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태민은 다른 3학년 선배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다. 잠시라고 했지만, 벌써 십 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십 분 동안 나는 최선을 다해 존재감을 지웠다. 음료도 마시지 않고, 대화에도 끼지 않고, 그냥 벽지의 일부가 되려 애썼다. 지나가던 시녀가 샴페인 잔을 권했지만 나는 손사래를 쳤다. 이 몸으로 술을 마셨다가 무슨 사고를 칠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원래도 술이 약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몸 상태가 어떤지조차 확신이 없으니까. 멀리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3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 무리가 뭔가로 낄낄대고 있었다. 저런 여유가 부럽다. 나는 이 자리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할당량을 다 쓴 기분이었는데. 그런데. "저기, 강소율 양?" 낯선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미망인이라고 들었는데, 그 나이대로 보이진 않았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한서린. 아버지의 애인. 나를, 그리고 어머니를 제거하려 했던 그 여자. 머릿속으로 온갖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도망친다, 모르는 사람인 척한다, 갑자기 배가 아픈 척한다……. 그 어느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최대한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답했다. "강태민 공작의 종매라고 들었는데, 처음 보네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오히려 소름이 돋는 종류였다. 꿀을 발라놓은 칼날 같다고 해야 할까. "네. 태호 가문에 입양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렇군요." 한서린은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물건을 감별하는 것 같았다. 옷매무새부터 신발 끝까지, 시선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뭔가를 평가당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이 여자 눈에는 나라는 인간이 하나의 서류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어느 가문 소속, 어느 정도 가치, 위험도 몇 퍼센트. "어디 출신이었나요, 입양 전에?" "……지방의 작은 가문이었어요. 기억이 잘 안 나요, 어렸을 때 일이라서." 미리 준비해둔 대답이었다. 태민과 함께 몇 번이나 연습한 대답. 연습할 때는 이렇게 떨릴 줄 몰랐다. 대본을 외울 때는 그저 문장이었는데, 지금은 한서린의 눈앞에서 그 문장을 하나씩 꺼내놓는 게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기억이 안 난다니, 신기하네요." 한서린의 눈빛이 살짝 가늘어졌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 여자는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다. 확신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웃고 있지만, 그 웃음 아래에서 계산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침을 삼키려는데 목이 바짝 말라 있었다. 뭔가 더 말을 붙여야 할 것 같은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다행히 그 순간,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엄마, 이 언니 누구야?" 금발의 어린 여자아이가 한서린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한다은. 한서린의 딸이었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고, 머리엔 커다란 리본까지 매고 있었다. 인형처럼 예쁜 아이였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어른스러울 정도로 또렷했다. "다은아, 잠깐 기다려." "근데 이 언니 이상해. 나쁜 아이 같아."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나쁜 아이. 그 말이 왜 이렇게 가슴에 콕 박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린아이의 말이라고 무시하면 그만인데, 무시가 안 됐다. 오히려 그 순수한 눈에서 나오는 말이라서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종종 어른이 숨기려는 걸 그냥 봐버리곤 하니까. "다은아, 무슨 말이야." "엄마가 그랬잖아, 나쁜 아이는 조심해야 한다고." 한서린이 잠시 당황한 얼굴로 딸을 내려다봤다. "그건 다른 아이 이야기고. 얘한테 실례잖아." "뭔데? 얼굴이 똑같은데." 그 말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얼굴이 똑같다. 한다은이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등골이 서늘해졌다. 똑같다는 게 누구랑 똑같다는 거지. 설마, 그 아이가 말한 '나쁜 아이'가 나랑 겹쳐 보인다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건가.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한서린도 순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웃음으로 덮었다. 그 표정의 변화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억누르는 얼굴이었다. "애가 아직 어려서 말을 함부로 해요.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성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목소리를 짜내는 동안 손끝이 떨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이러다 정말 티가 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별개로 몸이 먼저 반응해버리는 게 짜증스러웠다. 한서린은 잠시 나를 더 살피다가, 결국 딸의 손을 끌고 자리를 옮겼다. "다음에 또 봐요, 강소율 양." 그 말이 인사가 아니라 경고처럼 들렸다. 그녀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방금 뭐였지. 얼굴이 똑같다는 말, 그리고 기억이 안 난다는 나의 거짓말을 의심하던 그 눈빛. 이건 단순한 사교 인사가 아니었다. 한서린은 뭔가 눈치챘거나, 눈치채려 하고 있었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심장이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이 몸의 심장도 참 부지런하다. 위기 상황마다 어김없이 전속력으로 뛰어주니까. "소율, 여기 있었네." 태민이 다가와 내 어깨를 살짝 짚었다. "안색이 왜 이래?" "……별일 없었어요." 또 거짓말. 오늘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이제 그만두었다. 태민의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 온기 하나로 방금까지 얼어 있던 등줄기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방금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말하면 태민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태민은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미간을 좁혔지만, 곧 다른 학생이 그를 부르러 왔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자리를 옮겼다. "금방 올게." 혼자 남은 나는 대강당 한쪽에서 조용히 숨을 골랐다. 멀리서 한서린이 다른 귀족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겉으로는 완벽하게 사교적인 여인이었다. 그 안에 어떤 계산이 숨어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며 웃음을 나누고, 그녀는 우아하게 그 인사를 받아준다. 완벽한 사교계의 꽃. 다들 그렇게 알고 있겠지. 저 미소 뒤에 어떤 얼굴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고. 나만 알고 있었다. 저 여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런데 위험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대강당 밖으로 통하는 문 쪽으로 슬쩍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등 뒤에서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강소율 양, 잠깐 시간 좀 있을까요?" 한서린이었다. 어느새 다시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 이번엔 딸도, 다른 누구도 없었다. 단둘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피하려 했던 순간이, 결국 이렇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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