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은 단순했다.
조용히 살자.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 말을 세 번쯤 되씹었다. 이상하게 아침이 되니 결심이 더 단단해져 있었다. 어제는 이불 속에서 눈물 콧물 다 짜내며 다짐한 거였는데, 자고 일어나도 흐려지지 않은 걸 보면 이건 진심인가 보다.
화려한 복귀? 복수?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현실의 나는 이 학원에서 삼 년, 아니 앞으로 몇 년이 됐든 조용히 존재감 없이 버티는 게 목표였다. 남들 시선 안 받고, 이름도 안 불리고, 그냥 배경처럼 살다가 졸업하는 거.
관찰자.
딱 그 정도의 위치가 나에게 맞았다.
세수를 하며 거울을 봤다. 퀭한 눈, 부은 눈두덩. 누가 봐도 밤새 뒤척인 얼굴이었다. 손으로 뺨을 두어 번 두드려도 붓기는 안 빠졌다. 화장이라도 두껍게 하고 나갈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조용히 살 건데 뭘 그렇게 신경 쓰냐 싶어 관뒀다.
옷장을 열었다. 무난한 옷, 무난한 옷, 무난한 옷. 세 벌 중에 그나마 덜 눈에 띄는 걸 골라 입었다. 이 정도면 됐다. 튀지 않는 게 오늘의 목표였으니까.
식당으로 가는 길, 복도에서 마주치는 학생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명치 어딘가가 뻐근했다. 시선이라는 게 참 그렇다. 별거 아닌데, 쌓이면 무겁다.
"오늘도 안색이 안 좋네."
식당에서 만난 태민이 내 얼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잠을 못 잤어서요."
"왜."
"그냥…… 생각할 게 많았어요."
"뭘."
말문이 막혔다.
어제 이렘 교수와 나눈 대화, 십 년도 지난 기억, 마법력,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머릿속에서 그 조각들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쳤다.
전부 말하고 싶은데,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 모순이 참 나답다고 생각했다. 말하면 후련할 것 같은데, 말하는 순간 뭔가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그 기분.
"별거 아니에요."
결국 그 말로 도망쳤다.
태민은 잠시 나를 보다가, 더 캐묻지 않고 식사를 이어갔다. 그 모습이 서운하면서도 고마웠다.
뭐야, 이 감정은.
캐물어주면 무너질까 봐 무서운데, 안 캐물으면 서운한, 이 모순적인 감정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는데 남이 어떻게 알겠어. 참 편리한 자기 위로였다.
포크로 접시 위 야채를 뒤적거리며 딴생각을 했다. 어제 이렘 교수가 했던 말들, 마법력 측정 결과,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질 것들. 생각할수록 속이 더 갑갑해졌다.
"태민 오빠는요."
"뭐."
"무슨 생각으로 저를 데려온 거예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태민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요."
"음."
그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뭔가 대답하려다 말고, 다시 삼켰다. 목젖이 움찍이는 게 보였다. 뭔가 하려던 말을 눌러 삼키는 그 모습을, 나는 조용히 지켜봤다.
"가족이니까."
짧고 건조한 대답이었다.
가족.
그 단어가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리는지. 마치 처음 듣는 외국어 같았다. 알아는 듣는데, 내 것 같지 않은.
"……그렇군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수 없었다. 그 이상을 물으면 뭔가 무너질 것 같았다. 이상하게 그 예감이 확신처럼 다가왔다.
식사는 그렇게 어색한 침묵 속에서 이어졌다. 수프 그릇이 비워지고, 빵 조각이 사라지고, 그 사이사이 나는 태민의 얼굴을 몇 번이나 훔쳐봤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늘 저렇게 무표정한데, 속은 얼마나 복잡할까.
식사가 끝나고, 태민이 문득 물었다.
"오늘 저녁, 학원 대강당에서 신입생 환영 사교회가 있는데. 갈 거야?"
사교회.
귀족 자제들이 모여 서로 얼굴을 익히고 관계를 쌓는 자리. 나에게는 지뢰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화려한 드레스, 낯익은 성씨들, 그 사이에서 나를 알아보는 눈빛들. 상상만 해도 손끝이 차가워졌다.
"안 가면 안 돼요?"
"의무 참석이야."
"……그럼 가야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 갈 수 있으면 지금 당장 짐 싸서 도망가고 싶은데, 그건 또 다른 문제를 만들 게 뻔했다.
"불편하면 내가 옆에 있어줄게."
태민이 무심한 듯 말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위로가 됐다.
"진짜요?"
"쉬는 시간엔 계속 옆에 있어주기로 했잖아. 그거 유효해."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이 사람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큰 말은 안 하면서, 결국 필요한 순간에는 옆에 있어주는. 생색도 안 내고, 대단한 척도 안 하고, 그냥 담담하게 약속을 지키는.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이 사람에게 진심을 다 털어놓지 못했다.
왜 그런지 나도 잘 몰랐다. 어쩌면 다시 버려질까 봐. 마법력이 있다는 이유로, 그저 존재한다는 이유로 버려졌던 그 경험이, 마음속 어딘가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기억은 참 지독하게도 시간이 지나도 옅어지지 않았다.
"고마워요."
결국 그 짧은 말로 마음을 대신했다.
태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해. 저녁에 데리러 올게."
그가 식당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사람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왜 나를 구했는지, 왜 이렇게까지 챙기는지, 명확한 이유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매번 물으면 짧은 대답으로 끝. 그리고 그 뒤엔 늘 저 침묵.
가족이니까, 라는 말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걸 캐물을 여유는 없었다. 당장 눈앞에 놓인 사교회라는 산이 너무 크게 느껴졌으니까.
방으로 돌아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정원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저 웃음 속에 내가 낄 자리가 있긴 할까.
그 풍경이 마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다른 세계.
맞는 말이었다. 나는 이미 한 번 그 세계에서 죽었으니까.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난 게 아니라, 죽은 채로 이 몸에 눌러앉은 느낌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애매한, 그런 이상한 감각.
오늘 밤, 그 세계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옷장 문을 다시 열었다. 사교회에 입고 갈 옷이 마땅히 없었다. 무난한 옷 세 벌로는 어림도 없는 자리였다. 결국 시녀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있는 것 중 제일 나은 걸 걸어보기로 했다.
거울 앞에 서서 옷을 대보는데, 손이 살짝 떨렸다.
긴장.
이 단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저 화려한 무리 속에서 또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까, 누군가 내 이름을 알아볼까, 그 모든 가능성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저녁까지 남은 시간이 왜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지.
시계를 흘끗 보니, 벌써 해가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