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번 생엔 도망치겠습니다

4화

저택으로 돌아온 뒤로 나는 김다혜라는 이름의 그 시녀를 조금 더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유심히 본다기보다 그녀가 방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이 그쪽으로 딸려가는 걸 억지로 눈치 안 챈 척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세 살짜리 얼굴로 시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얼마나 이상해 보일지는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낯익었던 얼굴인데.' 그 얼굴이 대체 어디서 왔는지, 왜 이렇게 익숙한지 알아내야 했는데, 문제는 전생의 기억이라는 게 필요할 때는 죽어라 안 나오고 별것도 아닌 순간에 불쑥 튀어 오른다는 점이었다. 낮에는 유모가 붙어 있었고 밤에는 다혜가 교대로 내 방에 들어와 열을 재고 물수건을 갈아주는 게 일상이었는데, 나는 그 짧은 밤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순간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혜의 손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이마에 얹는 물수건의 온도를 맞추는 데도 유독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뜨거우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차가우면 손등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그런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도 어딘가 낯익다는 느낌이 자꾸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가 내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주며 무심코 흘린 한마디가 그 답이 되어주었다. "저도 어릴 때 이런 열병을 앓다가 겨우 살았거든요."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을 거다. 다혜는 그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물수건 위치를 매만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을 삼켰다. 전생의 마지막 몇 달, 감옥에서 나를 돌봐주다가 대신 매를 맞고 대신 국문을 당했던 그 시녀의 얼굴이 다혜의 얼굴 위로 정확히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분명 다르게 기록되었는데, 손길과 목소리의 결만은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죽었던 사람이 이번엔 먼저 태어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그 생각이 들자 목이 메었다. 세 살짜리 몸으로 눈물을 참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라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다혜는 내 눈가가 붉어진 걸 보고 열이 다시 오르는 줄 알았는지 이마를 짚어보고, 손목을 짚어보고, 그러다 별일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다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저 세 살짜리 아이가 유난히 시녀를 따르는 정도로 보였을 거다. 유모가 안아 올리면 얼굴을 돌리고, 다혜가 안아 올리면 순순히 안기는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녀 앞에서만은 조금 더 솔직한 말투를 쓰게 됐고, 그녀 또한 다른 어른들 앞에서는 하지 않던 표정으로 나를 대해주었다. 이를테면 유모 앞에서는 늘 예의 바르게 웃던 그녀가, 나와 둘이 있을 때는 가끔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스럽게 놀리는 표정을 짓는다든지. "아가씨는 가끔 애 같지 않은 말씀을 하세요." 그녀가 웃으며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면서도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걸리면 안 된다는 경계심과, 이 사람 앞에서는 걸려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으니까. 그 말투에 경계보다는 애정이 더 짙게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만은 믿어도 될 것 같다.' 그 확신이 서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탈출이라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세 살짜리가 저택 밖으로 탈출한다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계획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걷는 것도 아직 완벽하지 않은 다리로 대문을 넘겠다는 발상 자체가, 개구리가 뱀 앞에서 도망치겠다고 다짐하는 꼴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래도 마음속에 그 단어 하나가 자리 잡은 것만으로도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박현우가 다시 저택을 방문한 건 그로부터 얼마 뒤, 내가 또 한 번 밤에 발작적으로 목을 움켜쥐며 몸부림친 뒤였다. 사실 그날의 발작은 진짜 몸의 문제라기보다는 전생의 마지막 순간, 목에 걸렸던 그 감각이 꿈속에서 되살아난 탓이었는데, 그걸 옆에서 지켜본 부모와 유모는 또 한바탕 저택을 뒤집어놓았고, 결국 박현우가 밤중에 불려 오는 사태로 이어졌다. 그는 이번에는 부모를 부르지 않았다. 방문 앞에서 부모를 잠시 세워두고, 다혜만 곁에 둔 채 나와 조용히 마주 앉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언어로 말을 걸었다. "선생님, 저 사실 다 기억나요. 열아홉에 죽었던 것도, 그게 왜 그렇게 됐는지도."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세 살짜리 입에서 나온 문장치고는 지나치게 조리 있고 지나치게 담담했으니까. 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래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첫 진료 때부터 다른 의사들과는 눈빛이 달랐던 사람이었고, 부모 앞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질문들을 골라서 던지던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적어도 나를 정신병자로 몰아세우지는 않겠지.' 그 정도의 계산은 세 살짜리 머리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촛불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에서 흔들리는 동안, 다혜는 숨을 죽이고 우리 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박현우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그 이야기, 저만 알고 있겠다는 약속을 문서로 남기고 싶은데, 아가씨가 직접 서명하시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의사가 계약서를 들고 나오다니, 이 사람도 어지간히 이 나라 물을 먹었구나.' 목숨이 걸린 비밀을 말과 신뢰만으로 지킬 수 없다는 걸 이 사람도 알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그 종이를 받아 든 내 손은 어느새 능숙하게 마력을 흘려 넣고 있었고, 완성된 계약서 위로 은은한 빛이 번지는 걸 보며 박현우와 다혜 둘 다 숨을 멈췄다. 빛은 종이의 가장자리를 따라 은실처럼 번져나갔고, 글자들은 스스로 자리를 잡으며 미세하게 떠오르다가 다시 종이 위에 내려앉았다. 그 짧은 순간 방 안의 촛불마저 잠깐 흔들림을 멈춘 것 같았다. "이게…" 다혜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나는 그 마법이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전생에 그렇게 훈련해도 겨우 흉내만 내던 계약 마법이었다. 스승 앞에서 몇 달을 매달려도 종이 한 귀퉁이만 겨우 밝히던 재주였는데, 지금은 마치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듯 손끝에서 완성되어 나왔다. 손끝이 저릿한 감각이 남아 있었지만 그건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낯설게 상쾌한 느낌이었다. '이번 삶의 몸은, 적어도 이런 쪽으로는 배신하지 않는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금은 웃을 수 있었다. 박현우는 완성된 계약서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종이를 이리저리 기울여 빛에 비춰보기도 하고, 손끝으로 글자의 결을 따라가 보기도 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정도 마력이면, 이 저택에 갇혀 있을 이유가 없겠습니다." 그 말이 내가 그토록 기다려온 첫 번째 동아줄처럼 들렸다. 세 살짜리 아이가 저택 담을 넘을 방법을 궁리하던 며칠 전의 나와, 지금 마력으로 계약서를 완성해낸 나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지만, 그 거리를 좁혀줄 사람이 방금 눈앞에 나타난 셈이었다.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이 삶에서 진짜 계획을 세워도 되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다혜는 여전히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계약서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고, 박현우는 그 계약서를 조심스럽게 접어 자신의 품속에 넣었다. 그 손짓이 유난히 신중해 보였던 것이,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저 기분 탓이 아니었다는 걸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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