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번 생엔 도망치겠습니다

1화

천장이 낮았다. 그것도 이상할 정도로 낮았는데,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나무 서까래가 걸려 있는 걸 보면서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보다 먼저 내 손이 왜 이렇게 작은지를 의심했다. 손가락 다섯 개가 다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작고 통통한 손을 눈앞에 들어 올린 순간, 목덜미에 남아 있던 서늘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칼날이 내려오는 소리, 군중이 웅성거리던 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등지고 돌아서던 붉은 머리의 여자와 그 여자 옆에서 끝까지 나를 쳐다보지 않던 남자의 옆얼굴.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 남자가 나를 봐주길 바랐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났다. '스물아홉 살까지 회사에서 버틴 게 아니라 열아홉에 처형당했다는 게 함정 중에 제일 악질이었지.'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팔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서야 이게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걸 인정했다. 시험 삼아 발끝을 움직여봤다. 발가락이 움찔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다리 전체를 세워 일으킬 근력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 낙차가 우스울 정도로 커서 나는 잠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어제까지 계단 두 칸씩 뛰어다니던 몸이었는데.' 목을 좌우로 돌려보는 것조차 관절 하나하나가 새로 조립된 것처럼 뻑뻑했고, 그 감각이 오히려 이 상황이 실제라는 걸 자꾸 확인시켜줬다. 침대라기보다는 요람에 가까운 그 작은 나무틀 위에 누운 채로, 나는 벨벳과 자수로 뒤덮인 이불의 무게조차 버거워하며 눈알만 굴려 방 안을 훑었다. 방 안은 벨벳과 자수로 뒤덮인 요람 같은 게 놓여 있었고, 창밖으로는 정원수가 가지치기된 흔적이 지나치게 정교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저택의 뒷마당이 보였다. 벽에는 언제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초상화 한 점이 걸려 있었는데, 캔버스 속 여자의 눈매가 어딘지 낯익어서 자꾸 눈이 갔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커튼 술 장식, 손잡이마다 금박이 벗겨진 자국 하나 없는 문틀, 그리고 창밖 정원사가 아침부터 나뭇가지를 정리하는 소리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어서 오히려 사람 사는 냄새가 안 났다. 이도현 백작가. 그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내가 다시 태어난 게 아니라 되돌아왔다는 걸 확신했다. 세 살배기 몸에 열아홉 살의 기억을 통째로 밀어 넣은 계약이라면, 나는 갑도 을도 아니고 그냥 서명 한 번 못 해보고 떠맡은 피해자였다. '계약서를 검토할 시간도 안 주고 이렇게 조건을 밀어붙이는 건 명백한 갑질인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목구멍에서는 갓난아이 같은 울음소리만 새어 나왔고, 그 소리에 놀란 듯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건 젊은 여자였는데,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손끝은 야무지게 움직여서 이불을 정리하고 내 이마를 짚어보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소매를 걷어붙인 팔목에는 물일을 많이 한 사람 특유의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앞치마 주머니에는 손수건이 반듯하게 접혀 꽂혀 있었다. "아가씨, 또 나쁜 꿈을 꾸셨어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는데,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라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이 얼굴을 전생에서 본 적이 있다는 낯익음 때문이었다. 정확히 언제 어디서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 여자가 나를 보고 웃는 방식이 뭔가 마음에 걸렸다. 웃을 때 오른쪽 눈가에만 잡히는 잔주름 하나, 그게 어딘가 익숙해서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그 얼굴을 되짚어봤다. '지금은 일단 넘어가자. 세 살짜리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사람을 뜯어보면 그게 더 이상하니까.' 나는 대신 얌전히 눈을 깜박이며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녀는 내 이마를 짚어본 뒤 별말 없이 물수건을 짜서 목덜미를 닦아주었는데, 손길이 익숙한 걸 보면 이런 밤이 처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부모라는 존재들은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얼굴을 비쳤다. 아버지 이도현은 서재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다는 듯 서류 뭉치를 옆구리에 낀 채 방문 앞에 서서 나를 힐끗 보더니 "열은 내렸나" 한마디를 시녀에게 던지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고, 어머니 한지연은 그보다는 조금 더 방 안으로 들어왔지만 내 이마를 짚어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시녀가 짚어본 이마 상태를 보고받는 자세로 서 있다가 "별일 없으면 다행이지" 하고 돌아섰다. 그 짧은 대화 속에서 정작 나를 향한 눈길은 한 번도 오래 머물지 않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음 일정을 확인하듯 짧은 말을 주고받으며 방을 나섰다. "오늘 저녁에 손님이 온다고 했지." "네, 재무성 쪽에서." 나에 대한 화제는 그렇게 삼십 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마무리되고, 저택의 다른 안건들에 자리를 내주었다. 부부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집안의 위계질서가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 파악이 됐다. '위에서 보고만 받고 아래에서 다 처리하는 구조, 딱 우리 부장님 스타일이네.' 물론 지금 이 집에서 부장님과 제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게 문제였지만, 적어도 이 집에서는 내가 결재란에 도장 찍을 권한조차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시녀가 방을 나가고 혼자 남은 시간, 나는 천장의 서까래 개수를 세어보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다. 하나, 둘, 셋. 그러다가 문득 이게 내가 앞으로 몇 년이나 반복하게 될 일인지를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회사 다닐 때는 엑셀 셀 개수를 세면서 야근을 버텼는데, 지금은 서까래를 세면서 유아기를 버텨야 하는 신세라니. '적어도 야근수당은 없어도 되니까 그건 다행인가.' 그런 자조적인 계산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새 창밖의 빛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밤이 되자 낮에 억눌러 두었던 기억들이 다시 밀려왔다. 눈을 감으면 그 광장의 냄새와 소리가 그대로 재생됐고, 나는 세 살짜리 몸으로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공포에 짓눌려 이불을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목이 떨어지기 직전, 붉은 머리 여자가 몸을 돌리던 그 순간의 옷자락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고, 그 옆에서 끝내 나를 보지 않던 남자의 뒷목선이 자꾸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때 나는 그 남자가 최소한 눈길 한 번은 줄 거라고 믿었던 것 같은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얼마나 순진한 기대였는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죽는 순간까지 짝사랑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니, 그건 반성문 써야 할 일이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터지도록 울고 있었는데, 그 소리에 시녀가 놀라 뛰어 들어왔고, 곧이어 저택 전체가 부산스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복도를 뛰어다니는 발소리, 문이 여닫히는 소리, 누군가 등불을 들고 지나가는 그림자가 문틈으로 흔들리는 것까지 방 안에서도 다 느껴질 정도였다. "의원을 불러라!"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마님께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는 다른 목소리가 다급하게 겹쳐졌다. 나는 그 목소리들 사이에서 이 몸이 그렇게 튼튼한 편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이 밤이 이 저택에서 나를 처음으로 제대로 들여다볼 사람을 데려오는 밤이 될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시녀는 내 등을 두드리며 뭐라 계속 말을 걸었지만, 그 말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대신 대문 쪽에서 마차 바퀴가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가 이렇게 늦은 시각에, 이렇게 급하게 오는 걸까 —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도 전에, 나는 열이 오른 몸 위로 다시 눈앞이 흐려지는 걸 느끼며 정신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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